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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Feb 08. 2021

특이한 영국의 대학 시험

나는 석사와 박사를 통틀어 영국 유학 생활을 총 6년 가까이했는데 그중 4년 동안 시험을 봤고 시험 채점도 4년에 걸쳐했다. 시험이라면 학을 뗄 정도로 경험이 많아지고 여러 가지 특이한 제도와 관습을 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대학 시험과 비교를 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내가 경험한 영국 대학 시험의 특징을 써보려 한다. 개인적 경험에만 바탕을 두고 쓴 글이기 때문에 영국 대학 전체가 아닌 내가 다닌 학교에만 해당되는 사항일 수도 있음을 감안해 주시기 바란다. 또한 경제학 전공의 특성일 경우 별도로 언급하도록 하겠다.


1. 모든 과목의 시험 일정을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정해서 발표한다.


한국에 있는 대학을 다니던 학부생 시절에는 보통 각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와 학생들의 합의에 의해 수업 시간에 시험을 봤고 시험 시간이 예외적으로 긴 경우에만 따로 시간을 잡아서 시험을 쳤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시험 기간 두어 달 전에 대학 본부에서 모든 과목의 시험 일정을 확정하여 한 번에 발표한다. 4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6~7주간 이어지는 세 번째 학기에는 대부분의 과목이 수업 없이 연말 시험만 보는데 3월 초에 모든 과목의 시험 일정이 한 번에 공지되었다. 석사 때는 일정이 4월 초가 되어도 발표되지 않아 학생회에서 학교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하기도 했다.


2. 답안지에는 익명의 학생 번호를 입력한다.


시험을 치는 학기가 시작되면 개인별 시험 일정과 장소가 발표되는 동시에 답안지에 기입할 익명의 학생 번호(candidate number)가 부여되었다. 답안지에 이름이나 학번(student number) 등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쓰면 부정행위로 처리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징을 경험하고 나면 시험의 공정성 보장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한다는 면에서는 좋게 보이기도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마음도 든다.


3. 시험 한 번으로 성적이 결정된다.


학부생 시절에는 출석, 수시로 제출하는 과제, 발표 점수 등이 자잘하게 최종 성적에 반영되었고 시험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적어도 두 번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간고사를 두 번 봤던 과목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MSc, MRes, PhD 과정을 통틀어 10과목을 수강하였는데 MSc 과정의 선택 과목 한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연말 시험 한 방으로 전체 성적이 결정되었다. 예외적으로 MSc 과정 선택 과목의 성적 결정 기준은 논문 50%, 시험 50%였다. 아마 시험 문제의 답이 상당 부분 결정되어 있는 경제학의 특성 때문에 이런 평가 방식이 정착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다닌 학교에서도 최근에는 경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학부 1, 2학년 필수 과목과 MSc 필수 과목은 1월에 보는 시험이 추가되어 두 번의 시험 점수로 성적을 결정한다. 또한 일부 과목에서 숙제 제출 횟수, 수업 시간 참여도 등을 성적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MRes 2년 차나 PhD 1년 차에 수강하는 박사 과정 선택 과목의 경우 연구를 준비하는 과정이라 대부분 시험이 무의미한데, 실질적으로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존 논문 재현(replication), 심사자 보고서(referee report) 작성, 기말 논문 제출 등으로 평가 기준이 대체되고 있다고 들었다.


4. 70점 이상이면 우수한 성적이다.


미국의 영향을 받아 A, B, C, D, F로 성적이 부여되는 우리나라 대학과는 달리 영국 대학의 과목별 성적은 점수로 나오며 만점은 100점이다. 초중고 시절을 생각해 보면 100점 만점에 적어도 90점은 넘어야 우수한 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영국 대학에서는 70점 이상을 받았을 때 학부는 First, 석사와 박사는 Distinction이라는 등급으로 부르고 학부는 40점, 석사와 박사는 50점이 넘어야 과목을 통과(pass)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First/Distinction 등급이 전체 학생의 15~20% 정도이기 때문에 70점이 우수 성적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는 각 문항에 대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기가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채점 기준이 상당히 엄격하여 문제에서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답을 맞히더라도 그 답에 관련된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답안지에 충분히 설명해야 만점을 받을 수 있다. 간단히 풀이과정을 쓰고 답만 맞추면 만점이 주어졌던 한국과는 차이가 커서 석사 때는 짧은 시험 시간 내에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자세히 답안을 써야 하는지 감을 못 잡기도 했다.


5. 깐깐한 채점


우리 학교 경제학과에서는 채점을 한 번 더 해야 하는 답안지의 기준이 정해져 있었다. 학부의 경우 첫 번째 점수가 Fail 또는 First 등급이거나(40점 미만 또는 70점 이상), 각 등급별 경계에 걸쳤을 때(41점, 48~51점, 58~61점, 68~69점)였다. 보통 절반에서 2/3 정도의 답안지가 두 번째 채점자를 맞이하게 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채점이 차이가 나는 경우 조정하는 방법은 과목, 그리고 교수별로 달랐는데 보통 차이가 10점 이내면 두 점수의 평균을 최종 점수로 하였고 10점 이상이면 두 채점자가 모여서 점수 협의를 해야 했다. 이렇게 결정된 점수는 내부 및 외부 심의를 거쳐 한 번 학생들에게 발표되면 번복이 불가능했다.


실제 채점을 해 보면 도대체 채점 기준이 여러 조교들 사이에서 일관성 있게 지켜지고 있는 건지, 그리고 나 자신도 여러 답안지 사이에서 일관성 있게 채점 기준을 적용하고 있기는 한 건지 계속 의문이 들게 된다. 채점 기준이 모호하거나 답안지에 쓰여 있는 글자를 가장한 무언가를 해독하느라 기운을 쏟게 되면 특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채점한 답안지를 다른 사람이 두 번째로 채점하면 대부분 점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두 번 채점한다는 것이 채점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 싶기도 하지만 실제로 채점 기준의 일관성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alamy.com/exam-tables-and-chairs-set-up-in-a-uk-school-image25547148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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