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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Jan 13. 2021

영어로 학부생 가르치기

영어 저능력자도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사실상 연말 시험 한 번으로 전체 점수가 결정되는 제도 아래에서 시험 점수가 잭팟이 터진 덕에 석사를 했던 학교에 남아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 4년 동안 학비 면제와 생활비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참고로 생활비는 집세 내고 나면 순삭 되는 수준이었다.) 장학금을 받는 대가로 2년 차부터 학부생 또는 대학원생을 가르치는 일에 투입되었다.


대부분의 영국 대학들이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수업이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보통 교수들이 수업하는 강의(lecture)는 우리나라 대학의 강의와 비슷하다. 정원이 많은 경제학과는 필수과목을 한 번에 600명 이상이 수강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강의를 학교 근처 극장에서 진행하기도 한다. 이에 더하여 세미나(seminar) 또는 클래스(class)라고 불리는 수업이 있는데 여기서는 15~20명 정도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매 강의의 내용과 연관된 연습문제를 풀거나 토론을 진행한다. 대부분 대학원생들이 클래스를 가르치게 되며 대형 과목은 클래스를 담당하는 조교가 20명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다.



MRes 1년 차가 끝나갈 때쯤 가르치기를 희망하는 과목을 접수받았다. 이미 1년 차부터 월급을 받으며 학부생들을 가르치던 입학 동기들이 있었는데 이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두 가지 전략을 세웠다. 과목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영어를 최대한 덜 쓰고 수학을 많이 쓰는 과목을 선택한다는 것과 어차피 3년 동안 쭉 가르쳐야 하므로 인기가 높지 않은 한 과목을 3년 동안 계속하면서 수업 준비 시간을 줄인다는 것이었다. 학부 2학년 필수과목인 계량경제학이 두 조건에 꼭 맞다고 생각하여 손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졸업 때까지 이 과목만 조교를 했으니 두 번째 조건은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수업 때 수학, 통계학을 이용하여 대충 문제나 풀어주면 되겠지라는 생각은 반쯤 빗나갔다. 이 과목에서는 Mostly Harmless Econometrics라는 책을 공동으로 쓴 Steve Pischke라는 교수가 첫 번째 학기를 맡고 있었다. 이 분은 계량경제학의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등 데이터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학부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데이터 해석이라 함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놓고 본격적으로 썰을 풀어보자는 뜻이므로 영어 안 써보겠다고 꼼수를 부리다가 오히려 된통 당한 셈이었다. 다행히도 두 번째 학기는 평범하게 OLS 구하고 통계학 쓰고 하는 계량경제학 내용이라 그나마 쉽게 넘어갔다.



수업 진행 외에도 조교가 수행해야 할 잡다한 업무가 많이 있다. 나는 보통 1년에 두 클래스를 맡았는데 이런 경우 총 수업 시간이 40시간(10시간 × 2 클래스 × 2학기)이었다. 숙제 채점은 한 학기에 서너 번씩 했던 것 같다. 수업과는 별도로 매주 학생들이 찾아와 질문을 할 수 있는 오피스 아워(office hour)를 한 시간씩 가졌고 학기말에는 각 학생에 대한 평가의견을 간단히 작성하였으며 수시로 이메일 질문에 답변을 했다. 가장 손도 많이 가고 난이도도 높았던 것은 시험 채점이었다. 숙제는 최종 성적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제출하는 학생도 많지 않았고 채점을 대충 해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시험은 그게 아니었다. 학생들의 성적을 결정짓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점도 부담이었지만 글자 해독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내가 영어 필기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읽기 힘든 답안지는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들도 읽기 힘들어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결국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글씨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계속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시험 채점은 끝까지 피하고 싶은 업무 중 하나였다.


매 학기 학생들을 대상으로 클래스에 대한 설문조사가 실시되는데 여기서 평가가 안 좋으면 원칙적으로는 다음 해에 조교를 계속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는 조교는 항상 공급이 수요에 못 미치는 데다 나 같은 경우는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좋든 싫든 조교를 해야 했던 상황이라 사실상 평가에 대한 부담은 없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평가가 좋지 않으면 당연히 기분이 나빴다. 첫 해에 특히 그런 편이었는데 설문지에 조교의 영어 수준을 묻는 질문이 있어 이 문항에 대한 점수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고 두 명의 학생이 특별히 추가 의견 란에 하나부터 열까지 총체적인 난국이라는 식의 악의적인 말을 써놓았다. 그 해까지만 해도 학생 설문조사의 전산화가 부분적으로만 되어 있어 추가 의견은 학생들이 손으로 작성한 의견을 캡처하여 보여 주었는데, 숙제 채점을 하면서 글씨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 보니 악플러의 정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따뜻한 의견들도 많았지만 악플 두 개에 유난히 분개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유명 연예인들의 심정을 잠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해에도 학생들의 평가가 그리 나아지지 않았지만 세 번째 해부터는 평가 점수가 비약적으로 상승하여 학부 평균을 넘어서게 되었다. 사실 학부 2학년 필수 과목의 조교 평가 점수가 가장 낮은 편이라고 하니 이 요인을 고려하면 1~2년 차에 받은 평가 점수도 그렇게까지 바닥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단 조교의 영어 수준을 묻는 질문이 설문지에서 사라지기도 했고 (의사소통이 원활하냐는 질문으로 대체되었다.) 같은 과목을 계속 가르치다 보니 시험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가 어느 정도 예측이 되어 클래스 때 이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룬 것이 평가 점수 향상의 비결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이면 우리나라와는 달리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토론을 즐기고 진정한 배움에 목말라 있을 것 같지만 시험에 나올 내용을 찍어주기 시작하면 눈빛이 바뀌는 건 전 세계 공통이었다.



조교 업무와 관련하여 두 가지 특별한 경험을 했는데 첫 번째는 코스 매니저(course manager) 역할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제학과 학부 필수 과목은 조교 수가 10명을 훌쩍 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코스 매니저는 이들과 교수 사이에서 강의 및 행정 관련 사항을 중재하는 업무를 추가로 수행하게 된다. 코스 매니저는 석박사 과정을 가르치는 티칭 펠로우(teaching fellow)와 동급으로 대접받으며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더라도 따로 월급까지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내 능력이 모자라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코스 매니저를 하겠다고 지원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세 번째 해가 시작되기 직전에 계량경제학 교수 한 명이 연구실로 찾아와 두 번째 학기 코스 매니저를 할 사람이 없다며 나에게 일단 반년만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 과목만 계속 가르치다 보니 의도치 않게 내가 조교들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돈도 더 준다고 하고 반 년 동안만 하는 거라 한 번 해보기로 하였다.


학기 중에는 과목 홈페이지에 공지사항 올리고, 질문 올라오면 답 달아주고, 숙제와 해답 파일에 오타 있으면 고치고, 1주일에 한 번 조교 회의를 소집하고, 교수가 낸 시험 문제 난이도를 체크하는 등의 일을 했다. 사실 이러한 잡다한 업무를 모두 합친 업무량이 연말 시험 이후 2~3주 동안의 업무량에 못 미칠 정도로 시험 관련 업무가 많았다. 시험 채점 기준을 작성하고, 답안지를 채점하는 사람들에게 배분하고, 채점하는 사람들이 채점 기준을 잘 지키는지 확인하여 피드백해 주고, 종합 채점 결과 파일을 만드는 등의 업무가 있었다. 사실상 행정직원과 비슷한 역할이었는데 유학 가기 전에 회사에서 총무 업무를 해 본 경험이 도움이 되었던지 크게 어렵지는 않았고 다만 시간을 많이 빼앗길 뿐이었다. 학교라는 상대적으로 낯선 환경에서 외국인들과 영어로 일을 해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덕분에 추가 수입도 있었고 코스 매니저들 고생한다고 학교에서 주는 교육 상(excellence in education award)도 받을 수 있었다. 그다음 해에도 원하면 계속할 수 있었지만 빨리 논문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가야 할 상황이라 계속해보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또 다른 경험은 여름학기 수업이었다. 여름학기는 3주 동안 거의 매일 수업과 시험이 이어지는데 오전에는 3시간 동안 교수의 강의가, 오후에는 1시간 반씩 두 개의 클래스가 진행되었다. 여름학기 기간 동안 1시간 반씩 두 개의 클래스를 12번 가르치고, 숙제 채점을 두 번 하고, 시험 두 번과 쪽지 시험 한 번 감독과 답안지 채점을 하느라 그 기간 동안에는 가르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용이 가르쳐 왔던 과목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또한 학생들이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수업을 들으러 왔다가 결국에는 빠른 수업 진도에 지쳐서 런던의 여름을 즐기는 데 더욱 정신이 팔리는 경우가 많아 부담도 덜한 편이었다. 조교로서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입하는 대신 괜찮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두려워했는데 계속하면서 익숙해지니 생각보다 영어로 가르치는 게 어렵지 않게 되었다. 1주일에 두세 번씩 학부생들 앞에서 말을 하다 보니 세미나에서 발표할 때 긴장이 크게 줄어드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어로 학생들을 가르쳤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까 가끔씩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요행이 작용하여 내가 교수가 되지 않는 이상 어차피 시험해 볼 기회가 없을 테니 그냥 이 궁금증은 가슴 속에 묻어두려 한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info.lse.ac.uk/staff/divisions/estates-division/room-booking-venue-hire/Secure/hire-conference-fac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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