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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Jan 26. 2021

박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력자

운 좋게도 최고의 지도교수를 만난 이야기

유학 가기 전에 들었던 말이 있다. "대학원 과정에 유학 가서 생기는 문제 중 90% 이상은 공부 또는 연구만 잘하면 해결될 문제다."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하지만 내 유학 생활을 돌이켜 봐도 대략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역대급 천재가 아닌 이상 평범한 박사과정 학생이 혼자 알아서 연구를 잘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어떤 지도교수를 만나는지가 성공적인 박사과정을 위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사실 지도교수를 선택하는 법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대학원 생활과 관련된 조언들은 이 블로그에서 좀 더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렇게까지 전문적으로 조언을 줄 역량은 못 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지도교수 선정과 관련하여 내가 경험했던 것과 내 주변에서 들었던 사례를 쓰고자 한다. 한 가지 차별점을 찾자면 위 블로그는 이공계 얘기지만 내 경험은 인문사회계 쪽에 더욱 가깝다는 점이다.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대학원에 들어갈 때부터 지도교수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업을 1년 들은 후 MRes 2년 차 초에 지도교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다. 1년 차 시험이 끝나고 막막한 기분에 박사과정 주임 교수를 찾아갔는데 일단 교수와의 면담에서 연구 주제를 2분 정도로 압축하여 짧게 얘기해 보는 데서부터 시작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소위 엘리베이터 피치(elevator pitch)라는 것인데 엘리베이터에서 교수나 동료 학자를 만났을 때 자신의 연구 주제를 짧은 시간에 빠르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실 이 조언은 비단 지도교수와의 첫 탐색전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다른 연구자와 처음으로 만날 때면 언제든 유용하다.


여름방학 내내 시간을 마음껏 낭비하다가 학기 시작 직전이 되어서야 우선 MRes 2년 차 때 써내야 할 논문의 주제를 대략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교수들이 썼던 논문을 (주로 제목만) 살펴보면서 이 사람이 나와 맞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연구 분야가 내 관심사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교수 A가 있었는데 아직은 탐색 과정이므로 안면도 틀 겸 네 명의 교수와 만나서 얘기를 해 보기로 했다.


준비한 엘리베이터 피치를 끝냈을 때 교수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교수 1은 주제에 대해 심화된 질문을 던졌고 그 주제로 논문을 쓸 경우 형식과 내용 면에서 참고가 될 만한 논문을 하나 소개해 주었다. 교수 2는 주제에 대한 질문도 했지만 주로 졸업한 학교, 경력 등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수 3은 주제에 대해 짧게 한두 마디 조언을 해 준 후 '너의 관심사로 볼 때 교수 B를 추천하지만 혹시 그 사람이 거절하면 나에게로 와라'라고 말하면서 약 10분 만에 면담을 끝냈다. 교수 4는 설명을 들은 후 당장 2년 차에 쓰기에는 괜찮은 주제지만 졸업 후 학계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좀 더 중요하고 큰 주제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며 독려했다.


위 네 사람 중 누가 내 지도교수가 되었을까? 정답은 교수 1이다. 교수 1은 내가 교수들을 만나보기 전에 가장 잘 맞겠다 싶은 느낌을 가졌던 교수 A, 그리고 교수 3이 내 연구 주제를 듣더니 추천했던 교수 B와 동일인물이었다. 즉, 탐색과정에서의 첫인상이 그대로 선택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참고로 나는 박사과정 졸업 때까지 이 분과만 계속 지도교수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만큼 훌륭한 분이었고 나와도 잘 맞았다.



주변의 다른 학생들을 보면 적어도 반 이상은 면담 횟수 등의 사소한 불만은 있어도 그럭저럭 현재의 지도교수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학생들도 과거의 지도교수나 지도교수가 될 뻔했던 사람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와 지도교수가 같았던 한 선배가 왜 본인이 박사과정(PhD)을 하는 데 5년씩이나 걸렸는지 얘기해준 적이 있다. 그 선배의 첫 번째 지도교수는 평소에는 거의 학생을 방임하다가 학생이 괜찮은 성과를 내면 계속 지도를 하고 학생이 헤맨다 싶으면 가차 없이 다른 교수를 알아보라고 했다.(위에 언급한 교수 3이 바로 이 사람이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 번째 교수는 건설적인 방향 제시 없이 학생이 연구한 내용을 비판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이 유형은 다른 박사과정 동료들에게서도 비슷한 얘기를 많이 들었을 정도로 상당히 흔했는데 중요한 건 이러한 습성이 교수의 연구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참고로 이 선배의 두 번째 지도교수는 다른 학생에게 RA(연구 보조)를 해 주면 지도학생으로 받아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일만 시켜먹고 입을 싹 씻어버리는 짓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세 번째 지도교수가 좋은 분이라 겨우 직업을 구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한 번에 괜찮은 지도교수를 만난 내가 운이 아주 좋았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지도교수를 탐색할 때 그 교수가 현재 지도하고 있는 선배 학생들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정보를 얻는 것이 좋다. 내가 지도교수를 찾을 때는 그렇게 요청을 할 생각까지는 못했지만 만약 2년 차 학생이 나에게 지도교수 선택과 관련하여 면담 요청을 한다면 기꺼이 이런저런 얘기를 해 줄 것 같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우리 학교에서는 나처럼 박사과정 내내 첫 번째 정했던 지도교수의 지도만 받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박사과정에 입학하자마자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학교라면 지도교수가 사실상 정해져서 들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나 같은 사례가 더 많을 것이다.) 관심사가 조금씩 달라지거나, 지도교수가 다른 학교로 옮기는 등 학생 지도를 계속할 수 없는 사유가 생기거나, 지도교수와 도저히 맞지 않거나 하는 이유로 많은 학생들이 지도교수를 바꾸거나 다른 교수를 공동 지도교수로 추가한다. 공식 지도교수 관계는 아니더라도 다른 교수에게 면담을 요청할 수 있는데 특히 잡 마켓에 나갈 거라면 추천서가 보통 세 장이 필요하므로 이런 면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눈도장을 미리 찍어놓을 필요가 있겠다.


2016년 10월부터 약 4년 반 동안 학기 중에는 지도교수를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났다. 발표를 앞두고 있거나 논문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는 더 자주 만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1~2주에 한 번씩 지도교수와 미팅을 하는 게 일상적이라고 하던데 우리 학교는 한 달에 한 번이 평균인 것 같았다. 지도교수와의 면담 전에는 항상 슬라이드를 준비하려고 노력했고 면담 후에는 미팅 때 나왔던 얘기를 간략히 정리하여 드롭박스에 올려놓았다. 영어로 학부생 가르치기 글에서 언급한 대로 영어가 딸려서 시작했던 습관인데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그 덕에 3~4주마다 돌아오는 교수님과의 미팅이 일종의 데드라인이 되어 미팅 전까지 슬라이드 준비를 위해 달리다가 미팅이 끝나면 결과 보고하는 사이클을 계속 경험하다 보니 회사 다니면서 일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최소한 지도교수 선정에 있어서는 운이 억세게도 좋았던 편이라 내가 조언할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다. 다만, 지도교수가 박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력자이기 때문에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혹시 맞지 않더라도 바꾸는 걸 주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고 싶다.


* 표지 사진 원 출처: http://phdcomic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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