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정말 알고 있다면 훌륭한 학자가 되었겠지만...
표지에 있는 만화의 지도교수는 독창적인(original) 연구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새롭고 틀을 깨야 하지만 지도교수가 이게 자신이 쪽팔릴 만한 내용인지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학계에서 확립된 방법론을 따르는 주제, 즉 같으면서도 다른 주제. 이쯤 되면 저 교수가 사기꾼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문제는 저 양반이 딱히 틀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좋은 연구 주제라는 놈은 찾기가 어렵다.
이 글은 아마도 내가 대학원 생활에 대해 쓰는 글 중 가장 짧을 것으로 보인다. 제목은 그럴 듯 하지만 막상 근사한 답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박사과정을 겨우 졸업할 만한 정도의 주제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를 공유하여 연구 주제를 찾느라 힘든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는 박사과정(PhD)으로 넘어가기 전인 석사(MRes) 2년 차에 논문을 하나 써내도록 했다. 이 논문의 주제로는 대학원 과정에 입학할 때 자기소개서(SOP)에 연구해 보고 싶다고 썼던 주제를 골랐다. 연구 주제를 고르는 요령이 전혀 없기도 했고 우선은 평범한 주제라도 논문을 써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2년 차가 끝날 때 논문을 급하게 마무리하여 제출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후에는 주제를 찾기 위한 외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변에 있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논문 주제를 찾기 힘든 줄 몰랐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2년 차에 썼던 논문의 주제에서 시작하여 관련 분야를 이것저것 건드려 보고 지도교수와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다행히 예상보다는 빨리 반년 정도만에 논문에서 답하고자 하는 질문(research question)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다음 반년 동안은 그 질문을 학문적으로 의의가 있도록 정교하게 만드는 과정과 본격적으로 가설을 세워 간단히 검증하는 과정을 거쳤다. 여름방학 동안에 실증 분석을 해야 했는데 한국에 갔다가 가족들을 데려오고 다시 런던 생활에 적응하느라 연구에 집중하지 못했다. 지도교수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미팅을 했을 때 다른 교수도 한 번 만나서 얘기해 보라는 권유를 했다. 이 다른 교수는 미팅에서 처음부터 확인했어야 하는 사항을 한 가지 물었는데 그 질문으로 인해 지난 반년 동안 가지고 있던 가설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이때 도움이 되었던 것이 동료 학생들과의 대화였다. 사실 나는 박사 생활의 고충 토로나 뒷담화라면 모를까 다른 학생들과 연구 이야기를 하는 건 딱히 즐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연구실에서 선배와 대화를 하다가 의도치 않게 연구 주제로 화제가 전환되면서 최근에 그 선배가 한 논문에서 읽었던 내용을 언급했는데 이 내용이 새로운 가설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 가설을 토대로 쓴 논문이 내 박사학위 논문의 1장(Chapter 1)이 되었으니 지도교수 선택도 그렇고 나의 박사과정에는 참 운이 많이 따랐다는 생각이 든다.
논문 주제를 찾는 사이사이에 아무것도 안 하고 논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일종의 회사원으로서의 정신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당장 주제가 떠오르지 않더라도 계속 연구 활동과 관련된 뭔가를 하고 있어야 논문 주제가 떠오를 때 제대로 기회를 잡을 수 있고 주제가 잡히면 논문이 완성될 때까지 꾸준히 일하는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주 열심히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일 규칙적으로 논문을 계속 찾아보면서 읽고 자료를 찾아보고 세미나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지 점검하려 노력했다.
정말 도움이 되긴 한 건지는 의심스럽지만, 정재승 교수의 책에 나오는 '창의성은 여러 맥락을 뒤섞는 데서 발생한다'는 내용에서 영향을 받아 전공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머리를 쓰는 활동도 이것저것 시도해봤다. 같은 연구실의 독일인 동기가 뜬금없이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길래 나도 제2 외국어를 한 번 공부해볼까 해서 고등학교 때 했던 독일어를 듀오링고라는 앱으로 하루에 15분 정도씩 꾸준히 공부한 적이 있다. 또한 리디북스, 밀리의 서재 등 독서 앱을 통해 전공과 관련 없는 분야의 책을 많이 읽으려는 노력도 했다.
박사과정 동기의 지도교수가 동기에게 유용한 조언을 한 가지 해 주었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바로 기존 논문을 찾아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데, 그 이유는 연구 아이디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논문을 찾아보게 되면 모든 연구가 이미 다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어 바로 다른 주제를 찾아 나서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구 아이디어에 대해 논리 전개, 방법론 등까지 충분히 생각해 본 다음에 기존 연구를 찾아보아야 나의 논문이 어떤 면에서 차별점을 갖게 될지를 더욱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목만 보면 똑같은 주제를 다룬 것 같아도 논문마다 보통 주제를 보는 관점이나 방법론은 다르기 때문에 나도 이 교수의 조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소 뻔하고 깨알 같은 조언을 늘어놓았지만 연구 아이디어를 찾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자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라'일 것 같다. 작년 3월에 코로나 19로 학교가 폐쇄된 후 전공 세미나가 온라인으로 옮겨 갔는데 세미나 직후 교수들이 연구 방법에 대해 학생들의 질문을 받고 답을 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한 교수가 본인 노트북에 있는 수십 개의 폴더를 보여 주었는데 이게 모두 결말을 맺지 못한 프로젝트라고 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계속 뭔가를 시도하라는 조언을 해준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너무나도 재미없고 올바르고 다들 알고 있는 결론이지만 결국 아래 그림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게 된다.
* 표지 사진 원 출처: http://phdcomics.com/
** 본문 사진 출처: https://blog.daum.net/35crystal/14807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