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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솔 Mar 24. 2021

나는 평생 지각할 것 같다

30년 동안 매일 아침 딸을 깨운 아빠

친구들과 약속을 할 때면 늘 내게 하는 말이 있다.

"늦게 오지 마!" 30년 넘게 살아오며 일생 지키지 못한 게 바로 시간 약속이다. 어디 친구들과의 약속뿐이랴. 학창 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내도록 나는 지각을 했다. 말하자면 지각으로 점철된 인생이다. 집에서 내 별명은 '거북이'다. 아빠는 가족들의 이름 대신 별명을 붙여서 부르는데(이상하게 큰언니는 이름을 부른다), 나는 근 몇십 년을 거북이로 불려 왔다. 이유는 맨날 지각을 해서다. 내 유서 깊은 지각의 역사엔 늘 아빠가 함께 했다. 불과 3년 전까지 아빠는 매일 아침 서른이 넘은 딸을 깨웠다.


"거북아~ 일어나라." 소리가 들리면, 나는 있는 대로 미간을 구기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지금이야 출근할 일이 없으니 '그땐 그랬지.' 톤으로 미소 지으며 말할 수 있지만, 상쾌하다거나 활기찬 느낌 같은 것은 도무지 들지 않는 게 회사원의 아침이다. 회사를 그만두자 더 이상 아빠가 나를 깨울 일이 없어졌다. 근 3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아빠의 과업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보통의 가정에선 대부분 엄마가 아이들을 깨우지만, 우리 집은 반대였다. 아빠가 내 '기상 책임자'가 된 데는 엄마의 다소 느긋한 양육법이 한몫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심하게 늦잠을 잔적이 있다. 엄마가 깨우는 걸 깜빡했던 모양이다. 엄마가 그냥 학교를 하루 쉬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기에 나도 태연하게 다시 잠이 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빠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애를 깨우지 않은 것도 모자라 학교를 빼먹게 하다니! 아빠의 상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 부분에선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스스로 못 일어나면 지각하는 거지. 뭐~ 그리고 기왕 늦은거 하루 쉬면 어때."

엄마는 뚝심 있게 나를 깨우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극성스러운 아빠는 '기상 책임자'가 됐다. 하지만 그런 아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 자주 지각을 했다.


그나마 걸어서 통학했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엔 지각이 잦지 않았다. 문제는 버스를 타고 다녔던 고등학교 때였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이동 시간 등은 결코 고려하지 않은 시간대에 느릿느릿 집을 나섰다. 1교시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서야 교실에 들어서곤 했는데, 이때 담임 선생님이 붙여준 별명이 대학생이었다. 이미 고등학생 때 별명이 대학생이었으니, 대학생 시절이 어땠을진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지라 직장인이 되고 나선 학생 때처럼 배짱 좋게 지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뭐 그렇다고 출근 십 분 전에 도착하는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5분 10분씩 찔끔찔끔 늦은 날이면 면구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에 들어섰지만, 사실 전혀 죄송하지 않았다. 6시 땡 하면 퇴근하는 거 아니잖아요?


몇 년 동안은 지방에 있는 회사에 다녔다. 부산에서 울산까지 새벽 6시 반에 통근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했다. 이때도 야행성 습관을 버리지 못해 새벽 1~2시에 잠이 들어 새벽 5시 반에 일어났다. 4년 넘게 3~4시간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니. 지금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물론 여기엔 아빠의 공이 컸다.


아빠는 매일 새벽 나를 깨우고, 차를 몰아 통근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줬다. 20대의 남아도는 체력으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잠깐 잤다가 출근하는 날도 많았다(어릴 때부터 체력 하나는 좋았다). 통근버스 타는 곳이 번화가의 지하철역 앞이라 새벽 6시에도 술집에 남아있는 손님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아빠는 혀를 끌끌 차곤 했다.


"이 시간까지 술 마시고 있는 애들은 뭐 하는 애들이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진탕 술을 마시고 온 나는 그때마다 속이 뜨끔했다.

'아빠.. 나 같은 애들이야..'


아빠는 지금도 가끔 울산의 회사 근처를 지나갈 때면 가슴이 짠하다고 한다. 잠 많은 내가 새벽마다 출근하는 게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막내 딸내미 출근시키겠다고 매일 새벽 차 시동을 켰던 아빠가 더 짠했다. 일생을 지각으로 살아왔던 내 곁에 극성맞은 아빠가 있었기에 그나마 적응하며 살아왔다.

"거북아~ 일어나라." 부르는 소리가 가끔 애틋하게 그리워지는 것도 그 이유겠지.


언제부턴가 나는 거북이라는 별명을 꽤 아끼게 됐다. 이름 자체가 귀엽기도 하고, 무엇보다 녀석들의 느긋함은 내가 추구하는 삶이기도 하다(게다가 장수의 아이콘 아닌가). 그렇다고 그들이 마냥 느리기만 한 건 아니다. 보홀에서 거북이를 눈앞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의외로 헤엄치는 속도가 빨라서 도저히 따라잡지 못했다. 녀석은 예의 태연한 눈을 껌뻑이며 유유히 멀어져 갔다. 필요할 땐 속도를 내지만 특유의 느긋함은 잃지 않는다. 얼마나 멋진 삶의 태도인가. 그만큼 갖기 힘든 것 또한 삶의 여유로움이다. 매사에 여유를 부리고 살만큼 우리의 일상은 녹록지 않다. 지옥 같던 출근에선 벗어났지만 매일 일을 해야 하고, 모든 일엔 마감 시간이 있다. 때론 매사에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앞으로도 잘해나갈 수 있을까? 시간을 너무 허비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진작에 결혼해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을 보며 새삼 30대 중반 미혼임을 실감하기도 한다. 부모님 관점에서 나는 결혼 적령기를 놓친 막내딸이다. 내겐 껄끄러운 선택지이지만, 부모님은 그저 남들보다 늦어지는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식의 나이가 50대가 돼도 결혼의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게 부모다. 30년간의 '거북이 깨우기'에서 벗어난 아빠에게 이제 남은 과업은 '거북이 시집보내기'다. 늦둥이 막내딸을 낳은 죄로 몇십 년을 애달파한 아빠에겐 죄송하지만, 내 결혼은 계속 늦어질 것 같다. 늦잠 잔 딸을 쿨하게 학교에 보내지 않은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요즘이다.

기왕 늦어진 거 그냥 안 갈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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