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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로 Oct 21. 2021

악보넘기미-페이지터너

'콜록콜록' 기침소리가 콘서트홀에 울린다. 방향제가 콧속을 파고들 듯이 기침소리가 귓속으로 침투한다.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침방울들이 특유의 자극적이고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공연장 전체를 떠도는 듯한 느낌이다. 곧이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기계음이 울려 사람들을 웃긴다. 누군가 스마트폰에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켜놓고 종료시키는 걸 깜빡했나보다. 본래 음과 향은 많이 닮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객석이 아니라 무대 위다. 나는 페이지터너, 악보 넘겨주는 사람이다. 지금 내 눈앞에는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가 있고 그 뒤로 2000여 관객들이 보인다. 아직 공연장은 고요하다.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와 남성 피아니스트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 점검을 하는 중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있다. 검정색 옷에 검정색 뿔테 안경, 검정색 신발을 갖췄다. 누가 보면 장례식장 가는 걸로 알만한 외양이다. 객석에 있는 누군가가 내 옷차림을 보고 비웃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다. 아무도 내게는 관심이 없다. 관객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주자들이다. 피아니스트가 건반에 손을 얹는다. 첫 음을 낸다. 이제 시작이다.



사실 나는 연주자가 되고 싶었다. 건반악기든 현악기든 뭐든지 연주하고 싶었다.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도 세계 유명 콩쿠르에 나가 입상하고 방송을 타고 멋진 옷을 빼입고 인터뷰를 하고 박수를 받을 거라 생각했다. 유명한 선생님들로부터 레슨을 받았고 또래들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신동이라는 얘기도 가끔 들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은 머피의 법칙처럼 각종 전염병이 퍼질 때마다 휘청거렸다. 닭요리를 팔 때는 조류독감 때문에, 소고기 요리를 팔 때는 광우병에, 돼지고기 요리를 팔 때는 구제역에 시달렸다. 외풍에 흔들리던 우리 가족은 결국 무너졌다. 아버지는 거듭되는 음주 끝에 노숙생활을 시작했고 어머니는 집에서 먼 곳 어느 유흥주점에서 도우미 일을 해 돈을 벌었다. 자연스레 레슨도 중단됐다. 겨우겨우 학비를 마련해 고등학교를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편의점부터 시작해 패스트푸드점까지 어디서든 일했다. 한 출판사에서 책을 옮기는 일을 할 때는 책에 깔려 손가락을 다쳤다. 그 후유증으로 왼손 집게손가락 끝마디가 흉하게 휘어졌다. 연주자를 꿈꾸는 나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좌절과 우울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힘들어질 무렵, 악보넘기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악보를 읽을 줄 알고, 연주자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나는 적임자였다. 게다가 휘어진 왼손 집게손가락은 악보를 넘기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저주해 마지않던 내 장애가 나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해줬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악보넘기미 세계에는 공식이 있었다. 연주자보다 튀어서는 절대 안 됐다. 연주자에게 관객의 시선이 집중될 수 있게 입장할 때나 퇴장할 때 그림자처럼 움직여야 했다. 처음에는 비밀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스릴이 있었지만 곧 소외감이 가슴을 채웠고 깊어진 소외감은 공포와 불안감으로 번졌다. 악보넘기미는 연주자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항상 연주자의 왼편 뒤쪽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일어나고 앉을 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슬로모션으로 움직여야했다. 천천히 일어나 왼팔을 뻗어 악보의 오른쪽 위 모서리를 잡고 잽싸게 넘겨야 했다. 느린 곡은 여유가 있지만 빠른 곡은 번개처럼 넘겨야 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었다간 연주자는 물론 관객의 눈총을 각오해야 했다. 계속되는 긴장은 불안증과 신경쇠약을 불렀다.



잔물결 무늬가 가득한 공연장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아노 소리와 바이올린 소리가 겹쳐졌다가 이내 떨어진다. 두 소리가 서로 껴안으며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듯하더니 이내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협주곡을 들을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되살아나는 저 소리들을 사람들한테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영상을 다시 내 손 끝으로, 악기로 재현하면 사람들은 얼마나 감동할까? 하지만 이 생각의 끝은 항상 절망이다. 어린 시절 가정환경으로 인한 좌절, 그리고 내 휘어진 손가락은 다시금 나를 무릎 꿇린다. 연주하던 피아니스트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며 눈을 흘긴다. 내 심리상태를 알아차린 걸까?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악보 넘기는 타이밍이 그의 신경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연주자마다 스타일이 있긴 하지만 어떤 연주자는 악보넘기미에게 상처를 준다. 연주를 앞두고도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인사도 받지 않으며 마치 하인 부리듯 하는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농염한 눈빛과 손길로 희롱하는 연주자도 있다. 귀족과 노예의 관계라고나 할까. 주연과 조연이라고 할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도리질을 한다.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연주자가 되지 못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시샘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시샘으로 저들의 연주를, 관객의 감동을 망가뜨리는 것은 악행이라 여겼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를 만난 뒤부터였다.



그는 이 공연장에서 악보넘기미 일을 하는 친구였다. 동갑내기인 그는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집안사정으로 연주자의 길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와는 빠르게 친해졌다. 서로 외로운 날은 밤새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연주가 없는 날 몰래 공연장에 숨어들어 악기를 연주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어느날 텅 빈 무대에 올라 연극배우 흉내를 냈다. 나는 객석에 앉아 웃음을 띤 채 구경했다. 그는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연극배우처럼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대사를 읊었다. "어느날 우뚝 솟은 북한산 인수봉을 보다가 문득 느꼈어. 인수봉 옆에는 능선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걸. 화려한 인수봉 옆에 있다는 이유로 저 능선은 내내 무시당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는 나를 바라봤다. "누구나 인생에서 실패하고 실수할 수 있어. 하지만 성공만을 칭송하고 실수나 실패를 죄악시하면 안돼. 성공이 최선인 사회는 필연적으로 주연과 조연으로, 연주자와 페이지터너로 양극화될 수밖에 없어." 나는 내 과거를 들추는 그에게서 묘한 반감을 느꼈다. 그는 아랑곳 않고 대사를 이어갔다. 마치 마지막 사자후를 토하는 것처럼. "바야흐로 감수성의 시대가 왔다. 세월호 사건 이후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을들과 약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는 말했었다. 연예인을 성노예로 여겼던 과거의 인식 속에 고위인사에 의해 겁탈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부하직원을 불륜대상으로 삼아도 문제없다는 인식에 반기를 든 비서가 등장하는 것은 모두 당연한 수순이라 했다. 여성운동가들이 집회를 열고 남성 혐오 구호를 외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그의 1인극을 감상한 뒤부터 그간 당연시했던 그림자 노릇에 신물이 났다. 연주자들이 무시하고 관객들로부터 놀림을 받아도 곡의 완성을 위해 꾹 참고 넘어갔지만 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연주를 듣는 모두를 위해 희생하라는 무언의 압박은 목을 조르는 듯해 견딜 수가 없었다. 더이상 나는 말없이 악보를 넘기던 넘돌이 넘순이가 아니었다.   


연주는 막바지로 치달았다. 4악장 중반을 넘어섰다. 나의 굽은 손가락은 여전히 악보를 넘기고 있었지만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빠르고 울림 있는 선율 때문에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반항심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가 바로 이 무대 위에서 했던 대사들이 선율에 얹히는 기분이었다. 연주자들을 향한 시기심과 우울했던 과거에 대한 회한,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불안감이 한꺼번에 내 온몸을 휘감았다. 공황상태로 치닫는 내 상태를 감지했을까?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에서 자신감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피아노가 흔들리자 바이올린에도 불안감이 번졌다. 미묘한 불협화음을 잡아낸 귀 밝은 관객들을 중심으로 동요가 일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지자 그 동요는 다시금 연주자들을 흔들어 악순환을 가져왔다. 파국의 기미였다. 악보를 넘길 때가 됐다. 이제 정점을 찍을 때다. 두발을 모으고 허벅지에 힘을 주며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겼다. 허리에 힘을 줘서 상체를 펴 직립 자세를 만들었다. 왼발을 앞으로 옮겨 디딤발을 만들고 왼팔을 악보 쪽으로 뻗었다. 피아니스트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무대를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는 눈빛. 후들거리며 불안해하던 바이올리니스트도 얼른 넘기라는 의미의 다급한 곁눈질을 했다. 그들의 호소에 자칫하면 흔들릴 뻔했다. 그 순간 객석에서 한 사람이 일어섰다. 그는 주위 관객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꼼짝없이 서서 무대 위를, 아니 나를 응시했다. 그였다. 반가움도 잠시였다. 헤어지기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중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라. 소외된 자, 억압받는 약자는 테러리스트로 묘사된다. 마치 소외된 자, 억압받은 자의 말로는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은 일탈행위이자 다른 사람과 그 사회를 모두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로 여긴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사회는 정의롭고 지켜 마땅한 것인가? 빈곤한 자와 억울한 자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그 도시와 그 사회, 그 국가가 불완전하고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잘 생각해봐. 네가 지금 숨까지 참아가며 넘기는 저 악보는 누가 만들었지? 네가 발 딛고 있는 무대와 질서, 에티켓은 누가 정한 것인가? 그것은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인가? 너는 악보와 무대에 짓눌려 평생을 살아갈 거냐?" 뒷전을 때렸던 그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악보를 넘겼다. 한 장이 아닌 두 장을 넘겼다. 악보를 덮어버린 것이다. 순간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 객석에서도 탄식이 터져 나왔다. 두 연주자의 부와 명예, 관객들이 지불한 고액의 입장권이 모두 공중으로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악보를 집어 들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객석 쪽으로 난 계단을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내려갔다. 더 이상 소리 죽여 그림자처럼 걸을 이유가 없었다. 어안이 벙벙한 관객들이 그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든 채 유유히 걸어갔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묘한 쾌감이 일었다. 공연장 출입구가 열리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출입구에서 나는 무대 쪽을 향해 돌아섰다. 아직도 모든 이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주인공이 됐음을 느꼈다. 그간 지켜봐온 숱한 연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내 인생의 첫번째 주연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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