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 목련이 활짝 피었다. 아직 쌀쌀하다. 그래도 봄이다. 모처럼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날씨가 인간을 축복해 주는 날이다.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새소리가 요란스럽다. 새들도 기분이 좋은 가 보다. 바깥으로 향한 카페의 모든 문들을 활짝 열었다. 봄기운을 카페에 가득 채우고 싶다. 모차르트 음악을 틀었다. 천재는 이렇게 봄날을 축하했구나. 커피를 내려 천천히 마셨다. 봄볕이 카페의 귀퉁이를 비추고 있다. 열어 둔 창으로 차갑지만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머문다. 한 잔의 따뜻한 커피와 새소리 꽃 내음 바람 햇볕이 어우러진다. 오늘 나는 이유 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커피 주세요.”
첫 손님이 바람처럼 갑자기 들이닥쳤다. 짧은 커트 머리에 트레이닝 복 차림의 지나다. 아침 조깅을 하고 오는 길이다. 상기된 얼굴에서 상쾌함이 실려 왔다.
“2시간이나 달렸어요. 오늘날 너무 좋아요.”
표정마저 싱싱한 지나는 나와 동네 주민이다. 카페가 있는 언덕 진 골목의 가장 끝에 있는 초록 대문 집. 작은 마당이 딸리고 볕이 잘 드는 아담한 이 층집. 그곳에 지나가 산다. 지나는 요즘 사진을 찍으러 동네를 구석구석 누비고 다닌다.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커트 머리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즐겨 입는 지나는 곱상한 청년처럼 보일 때가 많다. 지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마셨다.
“오늘 저녁에 파티해요. 맛있는 거 많이 하니까 가게 문 일찍 닫고 오세요.”
지나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올 때처럼 순식간에 카페를 빠져나갔다. 상쾌한 잔향이 느껴진다.
지나는 광주로 내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했다. 아버지는 지나의 새로운 시작에 무조건적인 축복을 해줬다. 지나는 아버지의 지난 인생을 이해했고 엄마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하는 앞으로의 인생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지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잘 돌아다녔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 모든 것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경험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녀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고 감사했다.
김 여사와 모자 공방 희정 씨가 함께 왔다. 요즘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이제는 나를 찾기보다는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희정 씨는 공방 문을 열기 전에 의식처럼 카페에 들러 김 여사와 함께 모닝커피를 마셨다. 김 여사가 희정 씨의 모자 공방에 자주 가고 김 여사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한다고 했다. 둘의 사이가 어쩌다 저리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둘은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되었다. 차를 마시고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축복처럼 보였다.
점심때가 되자 성북동 나들이를 온 사람들이 간간이 왔다 갔다. 날씨 덕에 처음 오는 손님이 평소보다는 많다. 아침에 넉넉하게 만들어 둔 감자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가 되자 햇볕이 카페에 가득 들었다. 나른하고 잠이 온다.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셨다.
‘짤랑
카페 문이 열렸다. 남 작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카페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 대신 아일랜드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간다.
“날이 좋아요. 완전히 봄입니다.”
“저 다음 달에 결혼합니다. 청첩장 드릴까 하다 부담드릴 것 같아 관뒀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같이 인사드리러 올게요.”
남 작가를 보며 인생의 신비를 느낀다. 떠나버린 연인 덕에 절망 속에서 성공하고 돌고 돌아 다시 만나 결국 결혼까지 하는 이 남자. 절망은 희망을 품고 오고 희망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결국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들이 어디로 향할지는 신만이 알기에 우리는 앞으로 나 갈 수 있다.
“당분간은 너무 바빠 자주 못 올 걸 같아요. 제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장님의 도움이 커요,”
“그동안 지루한 제 이야기 잘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남작가가 가고 카페에는 아무도 없다. 카페 안을 잔뜩 내리쬐던 햇볕은 구석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날이 많이 길어졌다.
오후 네시다.
카페 문이 열리고 교복을 입은 하나가 들어왔다.
“쭈니 아빠 나 왔어. 옷 좀 갈아입고 올게”
하나는 이층으로 통통거리며 올라갔다. 고등학생이 된 하나는 학교가 끝나고 나면 9시까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다람쥐처럼 잽싸게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하나는 주방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뒤 이어 들어온 손님들의 주문을 받아 왔다.
“오늘의 커피 하나. 따뜻한 라테 하나.”
내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하나는 뜨거운 커피를 추출하고 스팀기로 데운 우유로 거품을 만들었다. 거품이 풍성한 우유를 커피에 따라 부으며 예쁜 하트를 만들었다. 라테 만드는 솜씨는 하나가 나보다 월등하게 나았다.
“쭈니 아빠 오늘 파티 잊지 않았지? 나 한 시간 일찍 왔으니까 좀 일찍 갈게. 이모랑 언니랑 의욕만 앞섰지 실력은 영 별로야. 내가 가야 해. 요즘 너무 신나고 재밌다.”
나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승낙의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쭈니 아빠 짱!”
하나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나가 살고 있는 골목 끝 초록 대문 집에는 식구가 셋이다.
집주인 황선영. 선영은 전주 누이 네 서 칠 지내다 올라와 제일 먼저 나와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러 다녔다. 마침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초록 대문 집을 발견했지만 돈이 많은 주인은 집을 팔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선영은 말 못 하는 홀아비 오빠를 곁에서 챙겨줘야 한다며 나를 팔아 집주인을 설득해 집을 사고 이사를 했다.
선영이 이사를 하기 무섭게 지나가 달랑 가방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지나는 반 강제로 방 두 개와 욕실이 딸린 이 층을 전세 계약하고 주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망하는 아주 저렴하게 하나에게 월세로 내주었다. 선영이 이사를 하고부터 호시탐탐 이 층의 방 하나를 노리고 있었던 하나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마침내 사람이 살지 않았던 초록 대문 집은 집주인 선영 이층 세입자 지나와 지나의 월세 세입자 하나가 함께 사는 공동생활 터전으로 재탄생했다.
하나는 카페에서 번 돈으로 월세와 용돈을 해결하고 있다. 윤 부부는 집을 나가 살겠다는 하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나는 졸업하면서 앞으로의 진로와 진학과 관련된 계획을 알렸다. 손으로 만드는 것은 뭐든 재밌는 특기를 살려 자신만의 예쁜 가게를 열고 싶다고 했다. 빵 과자 케이크 장신구 생활 소품 뭐든 예쁘고 맛있는 것들을 만들어 파는 것. 지금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라고 했다. 필요한 자격증 공부도 할 것이고 카페나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는 입학과 동시에 집을 나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야무지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꾸려 나갔다. 신은 하나에게 두 가지의 재능을 선물로 준 것 같다. 손끝에서 귀한 것들을 창조하는 능력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행동하는 안목과 지혜를. 하나는 어리지만 탁월하고 부러울 정도로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 나는 하나가 아름답다.
‘짤랑’
문이 열리고 선영이 나타났다.
“텃밭에서 야채 뽑다 왔어. 오빠가 내린 커피 먹고 싶어.”
선영은 초록 대문 집의 총괄 관리자다. 선영은 이 역할을 즐겼다.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텃밭에서 야채와 화초를 키웠다. 하나와 지나가 자신들 몫의 집안일을 스스로 잘할 수 있도록 전체적인 집안 살림살이를 이끌었다. 선영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오빠 이따 늦지 말고 와. 윤이 부부랑 티 형사도 올 거야.”
선영은 커피를 마시고 바로 일어섰다.
어두고 지고 윤과 티가 함께 왔다.
요즘 윤과 티는 함께 일을 한다. 한 달쯤 되었다.
‘죄지은 놈 잡아 가두는 일 10년 이상 했으니까 앞으로 10년은 누명 쓰고 감방 간 사람들 꺼내 주는 일 하렵니다.’
티는 술에 취해 농담처럼 말했지만 곧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오래 알고 지내던 인권 변호사 김과 젊은 변호사 서너 명을 모아 사무실을 개업했다. 재심 전문 변론과 돈이 되는 일반 변론은 함께 한다. 티는 공동 투자자이자 사무장이고 윤은 사무실에서 발간하는 월간 웹진 ‘진실과 화해’의 편집장이다. 윤은 일주일에 삼일은 출근해서 잡지를 만들고 나머지는 날에는 집에서 소설을 쓴다.
8시다. 윤과 티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하나와 함께 먼저 나갔다. 나는 카페를 정리하고 뒤따라가기로 했다. 하나가 일하러 오는 날은 뒷정리가 수월하다. 불을 끄고 문을 잠그려는 데 키가 큰 젊은이가 들어왔다.
“끝났나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서 나가주기를 기다렸다. 평상시라면 커피 한 잔쯤은 내려 줄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초록 대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한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나를 쳐다봤다. 이유 모를 절박함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로 아일랜드 바를 가리켰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앉았다.
커피를 내려 주었다. 그는 한 모금 마시고 카페를 한 번 둘러보았다.
“준이 친구 범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미국에 있다 왔어요. 어제 준이한테 다녀왔어요.”
나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범은 나의 강렬한 눈빛을 그대로 받아 주었다. 선량한 얼굴이다.
“그날 밤. 준이가 그렇게 가 버린 날. 둘이서 옥상에서 별을 보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제가 배탈이 나서 조퇴를 했어요. 아마 혼자 옥상에 별을 보러 갔을 거예요. 준이는 옥상에서 밤하늘 보는 걸 무지 좋아했어요. 우주만큼 커다란 평화가 자기를 감싸 안는다고 자주 그랬어요. 옥상 열쇠는 준이가 가진 것 말고 제게도 하나가 더 있어요. 원래 체육 선생님 잠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복사 한 사람은 저였어요. 준이는 자살한 것도 아니고 옥상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에요. 저예요. 담배 피우고 술 만신 건 바로 저예요. 그냥 밤하늘을 보러 갔다 발을 헛디딘 거예요. ”
범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 무섭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형이 있는 미국으로 도망쳤어요, 아무에게도 준이와 저의 사이에 대해 이야길 할 수가 없었어요. 준이가 그렇게 된 것이 전부 제 잘못인 것 같았어요. 사실 옥상에서 떨어져 죽어 버릴 까 생각했던 건 저였어요. 준이가 아니라. 준이는 옥상에서 별만 봤어요. 가끔은 저에게 시도 읽어줬어요.
준이를 처음 본 건 입학하고 며칠 지난 후였어요. 체육 선생님 열쇠를 몰래 복사해서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옥상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면서 혼자 땡땡이를 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준이가 우연히 열린 옥상 문으로 들어왔다 절 봤어요. 학교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왜 출입을 금지하는 나며 앞으로 옥상 올라갈 때는 자기한테도 알려달라고 했어요. 저는 성적과 진학에 대한 압박이 너무 심했어요. 그때 저를 이해하고 위로해 준 유일한 친구가 준이었어요. 그날 제가 배탈만 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처음 준이를 옥상에서 봤을 때 친해지지만 않았더라면. 수 백번도 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절 비난할 것 같았어요. 옥상에서 나쁜 짓은 혼자 다 해 놓고 저만 살았다고. 착한 준이대신 아무짝에 쓸모없는 네가 죽었어야 하는 거라고. “
범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알았다. 준이는 제일 좋아하는 걸 하다가 죽었구나. 신이 그 아이에게 허락한 이생에서의 삶이 그냥 딱 거기 까지였구나. 가족과 친구들의 가슴에 좋은 모습만을 남겨두고 가버렸구나. 그리고 준이의 속절없는 운명에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살았을 불쌍한 한 명의 영혼. 나는 범의 흐느끼며 들썩이는 어깨를 가만가만 두드려주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그건 그냥 준이의 운명이었다고. 더 오랜 시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무척이나 슬프다고.
범을 마당까지 배웅해 주었다. 내일이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범은 돌계단을 내려 천천히 걸어가다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는 골목으로 걸어 내려가는 범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 서 있었다. 밤하늘이 깨끗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준이를 매혹시켰던 밤하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엄마 아빠 행복하세요. 가슴에서 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없이 보낸 시간들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이제 초록 대문 집으로 가야 한다.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저 앞에서 하나가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쭈니 아빠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어느새 하나가 옆에 와 팔짱을 끼었다.
초록 대문이 코앞이다. 하나의 문이 닫히고 새로운 세상이 내 앞에 열렸다. 밤하늘은 역시나 깨끗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