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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Oct 26. 2024

끝 그리고 시작

G는 목공실에서 대패질을 했다. 어린아이 혼자 탈 수 있는 크기의 나무 보트. 대패질을 끝내고 니스 칠로 광을 내면 완성이다. 차에 실어 강가에 띄어보고 조금 더 크게 만들 심산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지나가 내려왔다. 


“사장 아저씨 저녁 드세요. 오늘은 스페셜 메뉴예요.”


해물 토마토 파스타와 과일샐러드 와인까지 곁들인 근사한 만찬이다.


“하나한테 전수받았어요. 어서 드세요.” 


G의 아내가 쓰던 그릇과 와인 잔이 장에서 나온 것도 실로 오래간만이다. 


“제 맘대로 좀 꺼냈어요. 이따 설거지해서 고대로 제자리에 놓을게요.”


G는 와인을 따서 지나 잔에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지나가 자신의 잔을 조심스럽게 G의 잔에 부딪혔다. 

진한 토마토소스에 새우와 홍합이 푸짐하게 들어간 스파게티는 맛있었다. 처음 해 본 솜씨로는 훌륭했다. 편의점에서 사 왔다는 단맛이 강한 와인도 오늘의 요리와는 궁합이 맞았다. 


“선영 언니랑 통화했어요. 저 은퇴해요.”


스파게티 접시를 싹 비우고 와인을 한 잔 더 마시던 지나가 홍조 띤 얼굴로 말했다. G는 지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과 지나의 가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음을 보고 느꼈다.       



일주일이 금방 갔다. 이제 곧 삼월이다. 날씨가 갑자기 푸근하다. 어제저녁부터 잔뜩 흐리더니 새벽에는 진눈깨비가 날리고 아침이 밝자 겨울비가 내렸다. 지나는 새벽 달리기를 거르지 않았다. 지나가 나간 사이 G는 아침을 준비했다. 


이제 곧 그녀가 여길 나간다. 처음 너무 당연하게 선영의 방을 열고 들어가 자기 방처럼 사용했던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간에 녹아들었다. 그녀 덕에 G의 공간에 온기가 흘렀다. 그녀는 서른이나 된 성인이었지만 G에게는 어미 잃고 찾아 들어온 작은 새처럼 가엽고 보듬고 주고 싶은 존재였다.

하지만 보듬어 주고 싶었던 여리고 철없고 순해 빠진 그녀가 오히려 G에게 큰 위안과 웃음을 주었다. 그녀로 인해 G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관계에서의 기쁨과 우정을 경험했다. 그녀가 이제는 진짜 자신만의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G는 그녀를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정성스레 차려 주고 싶었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계란찜을 했다. 김에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프라이팬에 바짝 구웠다. 참기름과 국간장으로 콩나물도 무쳤다. 김장 김치도 새로 내 먹기 좋게 썰었다. 지나는 밥상이 식기 전에 시간에 딱 맞춰 들어왔다.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지나는 g가 차린 오늘 밥상이 그녀와 지가 이 집에서 단 둘이 먹는 마지막 아침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다.


“감사해요”


입은 웃고 입지만 그녀의 눈은 촉촉하다. G도 지나도 아주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 남긴 없이 다 먹었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두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사장 아저씨 앞으로 또 와도 되죠? 저는 여길 아주 자주 올 거예요.” 


G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나의 말에 지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카페 문을 일찍 닫았다. 광주 집으로 내려가는 지나를 위한 조촐한 모임이다. 선영은 일찍 왔다. 


“커피~ 지나는 2층?”


G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지나는 여기가 좋대. 전화에다 대고 아침도 꼬박꼬박 해 먹고 이제 혼자 잘 살 수 있다나? 오빠가 가르쳤어?”

G가 웃었다.

“하긴 오빠는 맏이어도 우리한테 뭐 가르치고 시키고 그러진 않았지. 뭐 그런 건 내가 잘했지. 오빠도 알지? 내가 우리 집 대장인 거.”


G는 웃음이 나왔다. 하긴 선영이 위에 여동생들은 둘 다 얌전하고 몸도 호리호리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땐가? 오빠도 기억나지? 내가 언니들 머리 잡아당기고 치마 들추고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던 남자애들한테 돌 던진 동네 뒤집힌 사건. 문방구 집 아들 머리 깨져서 병원 실려 가고. 난리 났잖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애들이 피 보고 하얗게 질려서 막 울고. 엄마한테 끌려가서 잘못했다고 빌라고 하는 데 끝까지 개기다 엄청나게 줘 터졌잖아. 문방구 아줌마가 안 말렸으면 나도 병원 실려 갈 뻔했다니까. 암튼 엄마도 대단해. 내가 엄마 닮았어. 근데 오빠는 그거 모르지? 그날 밤에 언니들이 내 볼에 뽀뽀하고 막 껴안으면서 우리 선영이가 최고라고. 너무 멋있었다고, 우리 집 대장이라고 막 치켜세우는 데. 글쎄 이게 어린 내 가슴에 팍 새겨지더라 말이지. 대장. 멋지잖아. 우리 편 지키고 보호하고 이끌고.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잖아. 그게 누구든 내 사람이다 싶으면 끝까지 지켜줬지.”


“그런데 오빠 히히 실은 나 언니들 괴롭히는 남자애들한테 돌 던질 때 진짜 무서웠어. 나한테 전부 덤비면 어쩌지 더 큰 돌덩이 날아올까 봐 가슴이 콩닥거리고. 딱 삼십육계 줄행랑치고 싶었거든. 근데 울고 있는 언니들 보고 깡으로 버텼지.”


지는 선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지나랑도 그렇게 보낸 10년이었어. 대장! 그게 난 줄 알고 살았다니까. 내 안에 쫄보도 있는데. 그날 지나한테 엄청 깨치고 전주 가서 지난 내 인생 돌아보니까  진짜 무지막지하게 살았더니만. 힘들 줄도 모르고 막 달렸거든. 과로사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다 엄마 덕이야. 엄마가 맨 날 새벽마다 염불 하면서 뭐가 돼도 일단 명은 길어야 한다고. 부처님한테 기도했잖아. 그런데 나도 힘들어. 지쳤어. 이제 지나 인생 주인한테 돌려주려고. 야~오래간만에 속 시원하다.”


션영은 짧고 굻게 그동안의 심정을 얘기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내일 오후에 지나 은퇴 기자 회견할 거야.”


모두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막상 선영의 입에서 은퇴라는 말이 나오자 다들 놀랬다.


“건배하자고. 김 지나의 멋진 은퇴를 위하여!”


다들 잔을 들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지나가 은퇴하는 데 지대한 공을 했네.”


선영이 말했다.


“다들 감사드려요. 제일 힘들었던 때 함께 해주셨어요.”

“그럼 선영 씨는 뭐 합니까?”


티가 물었다.


“사무실 정리하고 직원들 일자리 좀 알아봐 주고.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먹고 자고 그럴 겁니다.”

“부럽습니다.”

“지나 씨는요?”


이번에는 웃고 있는 지나에게 물었다.


“저는 광주 집에서 놀고먹고 자고 그럴 거예요. “ 


다들 웃었다.


“기자 회견 준비는 다 했어요?”


윤이 물었다.


“뭐 언론사에 알렸고 지나가 낼 자기가 발표할 거야. 내용도 직접 준비한대.”

“잘 돼가?”


선영이 지나에게 물었다.


“응. 하루 종일 썼다 지웠다 하다 겨우 마무리했어요.”

“야 너 글은 좀 아닌데. 고생했네, 여기서 한 번 연습 겸 발표해 봐”

“에이 언니.”


지나가 손사래를 쳤다. 


“그럼 하지 마!”


“아니 한번 해 볼래, 잠깐만요.”


지나가 잽싸게 이층으로 올라갔다.


“넌 괜찮아?”


윤이 물었다.


“응 나도 홀가분해. 같이 얘기 많이 했어.”


“선영 씨 저랑 같이 사업합시다.”


티가 능글거리며 말했다.


“무슨? 흥신소?”

“아니요. 변호사 사무실이요. 저하고 선영 씨가 투자하고 공동 대표 겸 사무장 하면.”

“변호사는요?”


티가 갑자기 G를 쳐다봤다. 


“에이 말도 안 돼.”


선영과 윤이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변론하실 때만 말하면 되죠.”

“저는 진지합니다. 형님 생각 좀 해 보세요.”

“됐어요. 난 관심 없어요. 오빠도 이제 말하고 살긴 글렀어.”


선영이 맥주를 들이켰다.

지나가 내려왔다. 


“읊어 봐!”     


안녕하세요. 김지나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를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뜻하지 않게 데뷔해 과분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사랑과 관심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행운도 따라줬고 덕분에 영화제에서 상을 많은 영광도 누렸습니다. 하지만 배우 김지나가 아닌 자연인 김지나는 화려하고 주목받는 배우로서의 삶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배부른 투정처럼 들리지도 모르지만 유명 배우로서 보이는 모습이 저의 전부는 아니기에 말 못 한 고충도 많았습니다. 저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이 아닌 저의 실체가 드러나서 팬들이 실망할 까 두려워 자꾸만 원래의 저를 통제하며 살아가는 것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진정한 저를 드러낼 수 있는 배역이나 다양한 배역을 경험하기에는 어린 시절 배우 생활을 시작해 한 번에 인기를 얻는 것이 저에게는 축복이자 한계였습니다. 


이제는 평범하지만 건강한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배워야 하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대로 학교생활을 못해 저의 자연인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경험은 초등학생 수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저를 인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방송이나 극장이 아닌 곳에서 건강하게 제 몫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동고동락한 제 피붙이 같은 황선영 대표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은퇴를 결정하고 난 후의 복잡하고 힘든 뒤처리를 도맡아 해 주면서 누구보다도 저의 이번 결정을 가장 존중하고 응원해 주셨습니다.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살고 싶은 저의 바람을 돌보고 보듬으며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로 지나의 배우로서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응원했다.     

 



지나의 은퇴 기자 회견은 조용하게 끝났다. 사람들은 지나가 돌연 드라마를 펑크 내고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도망갔을 때부터 이미 그녀가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간 지나가 보여 온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행보가 이미 이러한 결말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나는 그렇게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지나가 광주로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동안 선영은 기획사를 정리한 후 전주의 큰 언니 집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 하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 근처의 여고로 배정을 받았다. 윤은 남편이 서재로 쓰던 방을 작업실로 꾸며 틈나는 대로 글을 썼다. 티는 토요일 저녁이면 와서 맥주를 마시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하다 늦은 밤 돌아갔다.

단골들은 자신이 늘 오던 시간에 카페를 방문에 커피를 마시고 주인장에게 은밀한 비밀 이야기를 하다 돌아갔다. G는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카페 일을 하고 밤에는 목공일을 했다. 하루가 하고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어도 사람도 카페도 세상도 늘 자신만의 방식대로 시간을 따라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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