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 아저씨 저 은퇴해요.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했어요.
예쁘다는 말을 항상 들으며 자랐는데 엄마는 예쁘다고 하신 적 없었어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남자애처럼 입히고 항상 똑똑해야 한다, 씩씩해야 한다고 하셨죠. 엄했어요. 90점 받아 오면 다음엔 100점 받게 노력해라. 100점 받으면 자만하지 말고 계속 열심히 해라. 사람들은 다 예쁘다, 공부도 잘한다, 칭찬하는 데 엄마는 왜 저럴까 늘 속상했어요. 그래도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았어요. 든든한 내 편. 산 같은 존재. 엄마만 내 옆에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았거든요.
어느 날 학교에서 친구들이 나는 아빠가 바람피워 데리고 온 첩의 자식이라고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요. 내가 엄마랑 하나도 안 닮았다면서. 어찌나 분하던지 애들을 막 팼어요. 다음 날 엄마가 학교 오셔서 맞은 애들 엄마랑 선생님께 죄송하다면서 머리 숙여 사과하셨어요. 어린 맘에도 사라져 버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엄마가‘너는 잘못했지만 비겁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는 잘 생각해서 말하고 행동해라. 너는 하나뿐인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다.’ 이러시는 거예요. 그 말을 하는 엄마가 너무 멋졌어요. 하나뿐인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 그 말은 또 얼마나 뿌듯하던지. 어린 제 가슴에 새겨졌어요.
배우 일을 시작한 것도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서였어요. 처음 캐스팅 제안받았을 때 엄마가 잘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엄청 열심히 했어요. 첫 주연 작품으로 영화제에서 신인배우상하고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받았을 때 엄마가 진짜 기뻐하셨어요. 삼촌들하고 친척들한테 전화해서 영화 꼭 보라고 자랑하시고 제작진들에게도 크게 한 턱 내셨어요. 배우 하면서 제일 행복했던 때였어요. 살면서 이렇게 좋은 날도 있구나 싶었죠.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로 너무 행복했었어요.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이런 거는 관심도 없었어요, 그냥 엄마가 좋아하니까 죽어라 했어요.
배우 되고 좋았던 건 그렇게 딱 5년이었어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유명해질수록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어요. 늘 남들의 기대와 평가를 의식해야 하는 이 일이 답답했어요.
엄마랑 선영 언니 때문에 버틴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좋아하니까. 그런데 그건 반 만 진실이었어요. 미래가 두려우니까 배우 말고는 해 본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만두지 못한 거였어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혼자 결정하고 책임지기 싫었던 거죠. 엄마랑 언니랑 그렇게 나를 길들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러도록 두 사람에게 계속 책임을 떠넘기고 살아왔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내가 엄마 친딸 아니어서 충격은 받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드라마까지 펑크 낸 건 내 고통과 슬픔을 도망갈 핑곗거리로 이용한 거예요. 힘드니까 나 좀 그냥 내버려 둬라는 어리광. 정신 차리고 보니까 하기 싫다고 그냥 관두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책임져야 할 내 인생이 있었어요. 언니한테 대들고 심하게 말한 건 두려워서 그랬어요. 자기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는 한심한 내 속마음 들킬까 봐.
이 나이 먹도록 너무 애처럼 살았어요. 그날 오피스텔에서 기자들 피해 카페로 오는 데 제가 너무 한하고 창피했어요. 그런데 이상해요, 한심한 제 모습 그냥 다 보고 나니까 겁은 덜 나요. 바닥까지 다 드러났는데 더 숨길 것도 없고.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것 같고. 여기서 더 한심해질까 하는 마음.
배짱인지 뭔지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잘살아보자 의욕도 생기고. 너무 잘 먹고 자고 이렇게 맘 편했던 적이 없었어요. 배우 그만두고 당분간은 이렇게 살면 될 거 같아요. 두렵고 막막하고 앞이 깜깜하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실감이 잘 안 나요. 제가 너무 멀쩡하고 그 어느 때보다 잘 살고 있다니.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라는 저에겐 희망이자 절망이었던 말. 이제 자유로워졌어요. 그냥 나로 살려고요. “
오늘에서야 엄마의 일기장을 다 읽었어요. 엄마는 엄마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했음을 알았어요.
아이를 데려왔다. 순이는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빠 없이 자란 순이는 자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아 아이를 내게 맡긴다고 했다. 아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아이를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이 지독한 엄마의 마음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예쁜 아이가 내게 오다니. 내 딸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내가 낳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커서 자신의 생모를 찾아 내 곁을 떠나버릴까 봐 겁이 난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고 했는데 지나가 지 생모처럼 살면 어쩌나 싶은 말도 되지 않은 걱정이 든다. 여자가 너무 예쁘면 얼굴값을 한다는 여성비하적인 통념이 신경이 쓰이다니. 지나가 얼굴만 예쁜 백치 인형처럼 자랄까 겁이 났다. 아이에게 똑똑하고 씩씩하고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뇌를 시킨다. 내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어린 지나에게 너무 가혹하다.
순이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예뻤다. 얼굴도 마음도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그런데 하늘은 무심하다. 삶은 그녀에게 너무 불친절하다. 그래서 그녀를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다.
남편도 지나가 자신의 딸임을 아는 눈치다. 하지만 내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진실을 부러 발설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남편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았다. 평생 나와 순이와 그리고 지나에게 빚진 마음으로 고통스럽기를 바랐다. 나는 참 잔인하다.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남편. 남편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남편 때문에 상처 입었다는 것조차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걸까?
지나에게 연예인 제의가 들어왔다. 지나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삶이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저 아이를 새 장안의 새처럼 혹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언제까지 내 울타리에 가두고 살 수 있을까?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는 것이 불행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아예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장점으로 성공하는 것이 지나에게도 더 나은 인생이 아닐까?
지나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기뻤다. 하지만 지나가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한편으로 찹찹하다. 저 아이는 진정 자신이 원해서 이 길에 들어 선 걸까? 내 맘에 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뭐든 했던 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존재가 내게는 기쁨이고 행복이라는 말을 해줄까? 그러면 자신이 원하는 걸 찾아 행복해 질까? 하지만 지나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내게서 떠나버릴까 두려워 망설인다. 나는 고민한다. 그리고 또 망설인다. 마음 놓고 기뻐할 수도 또 마음 놓고 칭찬해 줄 수도 없다. 이런 망설임과 고민으로 고통스럽고 지나는 나 때문에 상처 입는 것 같다.
황 대표가 일을 참 잘한다. 크게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업계에서 일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황 대표와 지나를 통해 대리 만족하고 있다. 성공하고 싶고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들. 이런 세속적인 욕망들로 가득 찬 나는 참 쪼잔하고 후지다.
지나가 점점 더 연예인 생활을 힘들어한다. 예쁘게 포장된 모습으로만 살기엔 지나가 아깝다. 그동안 충분했다.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엄마를 만족시키려고 애쓰지 말라고 해야겠다. 지나가 뭘 하던 뭘 하지 않던 그냥 나의 딸로서 아끼고 사랑한다는 오래 묻어 두었던 고백을 하려 한다. 황 대표와 셋이 진지하게 지나의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의논해 봐야겠다.
비밀을 안고 사는 인생은 무겁다. 드디어 순이를 찾았다. 곱게 늙어 있었다. 지나를 예쁘게 잘 키워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다. 기회를 봐서 지나에게 순이의 존재에 대해 알려 주려 한다.
남편에게 오래전부터 아끼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제는 내 오랜 상처를 내려놓고 남편을 용서한다.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나 또한 자유로워지리다. 이제는 내 삶에 평화가 찾아와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