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순이 씨는 기계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양치질과 세수를 마치고 소박한 화장대 한쪽에 모셔둔 성모상 앞에 앉아 기도했다. 그녀의 기도는 한결같다. 자식들의 안위와 자신의 건강. 기도를 마치면 그녀는 현관 앞에 놓인 작은 가방을 들고 재빨리 집을 나선다.
순이 씨는 전철 4호선 한성 대 입구 역 3번 출구 바로 옆 골목의 순이네 김밥집의 사장님이다.
남편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순이 씨에게 남겨진 것은 오래된 20평짜리 빌라와 한창 돈 들어갈 나이의 초등학생 3남매가 전부였다. 먹고살기 위해 급전을 융통해서 겨우 지금의 가게 자리에 테이블 두 개의 분식집을 차렸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다고 순이 씨는 음식 솜씨도 좋았고 장사에 소질이 있었다. 좁은 가게에 손님을 많이 받을 수 없자 싼값에 포장 김밥을 팔기 시작했다. 지금은 너무나 흔한 음식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쿠킹포일에 싸서 한 줄씩 파는 김밥은 곧 전철역을 오가는 행인들에게는 인기 메뉴가 되었다. 그렇게 장사가 잘되자, 가게를 늘리고 김밥의 종류를 늘리고 일하는 직원 수를 늘렸다.
올해로 장사를 시작한 지 20년. 자식들을 장성해 교사가 된 딸과 회계사 큰아들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초등학생이었던 막내아들은 대학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 중이다. 재산도 많아졌다. 역세권의 목 좋은 곳에 순이 씨 명의의 아파트도 있고 잔고가 두둑한 예금 통장과 고향에는 땅도 생겼다.
자식들은 이제 일을 그만두고 편하게 살라고 한다. 하지만 이제 막 환갑이 지난 순이 씨에게 김밥집은 그녀의 열정이고 희망이고 삶의 전부다. 자기 김밥집을 찾아주는 손님들이 아직도 얼마나 고마운지 자식들은 그녀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다.
새벽 5시 30분. 그녀가 도착한 곳은 집 근처의 허름한 목욕탕. 이 목욕탕도 그녀의 김밥집만큼 나이가 든 곳이다. 그녀는 10퍼센트를 할인해 주는 한 달 이용 쿠폰을 구매해 매일 새벽 이곳에서 목욕한다. 벌써 햇수로 15년째.
15년 전, 가게 세는 올려줘야 하는 데, 매출은 더 이상 늘지 않고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점점 늘어만 가던 때. 너무 힘들어 주저앉아 울고 싶었던 날. 우연히 손님이 손에 쥐어 주고 간 목욕 쿠폰 한 장. 망설이다 간 목욕탕. 아마도 순이 씨가 자신을 위해 부린 최초의 호사였다. 그리고 목욕을 하다 떠오른 아이디어로 순이 씨는 인생의 한 고비를 넘겼다. 저렴한 가격에 포장 김밥 팔기. 장사가 아주 잘 됐다.
그 이후로 지치고 피곤한 몸을 달래주는 새벽 목욕은 순이 씨가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치르는 신성한 의식이다.
우선 가볍게 샤워하고 머리를 감은 후 미지근한 탕에서 반신욕을 잠깐 한다. 적당히 몸이 데워지면 열탕으로 옮겨 편안한 자세로 앉아 온몸을 뜨끈뜨끈한 물에 푹 담근다. 몸이 노곤해지고 고된 노동으로 여기저기 뭉쳐있는 근육들이 풀어지고 나이 든 육신에 깊이 박혀있는 오랜 통증들이 잠시 사라진다.
‘좋다.’ 순이 씨 입에서 나지막한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얼굴에서 열이 나고 더워지면 탕 밖으로 나와 샤워기가 달린 개인용 거울 앞에 앉아 때를 민다. 빨간색 이태리타월 속에 오른쪽을 집어넣고 목에서 시작해서 팔 가슴 배 허벅지 엉덩이 순으로 정성스럽게 때를 민다. 매일 하는 목욕이라 묶은 때가 있을 리 없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때를 민다.
한바탕 때를 밀고 샤워기로 싹 씻어 내리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얼굴에 혈색이 돌고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이제는 냉탕·온탕을 할 순서다. 순이 씨는 온탕에서 시작해 냉탕으로 끝을 맺는 순서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에 번갈아 몸을 잠깐씩 담근다. 몸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정신이 또렷해지고 생기와 활력을 되찾는다.
탕 안에서의 모든 절차를 흐트러짐 없이 잘 마친 순이 씨는 밖으로 나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 뽀송한 피부에 보습제를 골고루 바른다. 그녀가 목욕탕에 들어온 후 1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허투루 쓴 1분의 시간도 없이 새벽 목욕을 무사히 마쳤다.
이제 마지막 순서다. 계수기에 앉아 있는 노인네는 선잠을 잤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순이 씨가 다가가자 묻지도 않고 병에 든 따뜻한 꿀차와 구운 달걀 2개를 내민다. 셈은 치르지 않아도 된다. 한 달 치 목욕비에 미리 계산을 해뒀다. 널찍한 평상 마루에 앉아 하루의 첫 끼니를 시작하는 순이 씨.
힘들고 고된 세월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준 건 아이들이 아니었다. 새벽 목욕과 한 병의 꿀차와 구운 달걀 두 알. 순이 씨가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에서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사랑해 줄 수 있는 하루 중 유일한 시간.
날이 밝았다. 김밥집으로 향하는 순이 씨는 세상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아름답다.
순이의 손에 우연히 쥐어진 목욕 쿠폰은 지치고 힘든 순이를 위해 신이 주신 선물이었답니다. 신은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당신의 신은 지혜롭고 자비롭고 세심합니다. 그러니 잘 살펴보세요.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