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관계 맺음의 첫 단추
지난 화 필자는 유년 시절 엄마에게 비틀어진 애정 형성 단계를 거쳤음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가정에서 사회로 나가는 순간부터 타인과의 소통이나 관계를 다루는 것에 유달리 서툴고 어려움이 많았다.
이번 화부터는 성인이 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어린 시절 경험을 좀 더 세부적으로 회고해보려 한다.
아무래도 인생 처음 가정에서 사회로 내딛는 큰 첫걸음은 유치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직도 잊지 못할 아련한 기억 하나.
유독 나를 좋아하던 한 남자아이, '희철이(가명)'를 만나게 된다.
땡땡아! 나랑 놀자~
희철이는 항상 나를 보면 활짝 웃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졸졸 쫓아다녔다. 당연히 자신을 아무런 조건 없이 좋아해 주는 사람이 싫지 않았지만 가정 내에서 엄마에게 사랑을 좀 달라며 매달리던 애정관계에 익숙해있던 필자에겐 그 투명하고 솔직한 마음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색한 느낌이 다분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발동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 자신이 겪어왔던 상황이 아닌 이 어색한 느낌의 상황을 회피해버린 것이다.
- 땡땡아! 나랑 짝하자~
- 아니.. 나 너랑 짝 안 할래..
- 그래? 그럼 누구랑 할 건데??
- 나.... 어....
짝을 안 한다고 하면 금세 떠날 줄 알았더니 희철이는 집요하게도 나의 짝 상대가 누군지 순진무구하게 물어왔다. 그 맑은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눈빛을 피해 두리번거리다 항상 말수 없이 혼자 떨어져서 놀고 있던 '민수(가명)'가 눈에 들어왔다.
- 아, 나 민수..! 민수랑 짝 하려고...
- 아하, 그래? 알겠어!
티없이 맑은 희철이는 나의 거절에 맘이 상해 일부러 더 밝게 행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짝 상대 이름을 듣자마자 곧장 다른 아이에게 짝을 하자고 말하러 가버렸다.
그 희철이의 뒷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빨리 가버릴 건 없잖아...
못 이기는 척 한번 더 짝하자고 물어봐주지...
제발 나랑 같이 있어줘
결국 사랑받는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어린 필자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그 아이를 밀어버리는 행동을 택하고 만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눈길도 안 주던 민수에게 어쩔 수 없이 다가가 같이 짝을 하자며 말을 붙였다.
- 저.. 민수야.. 나랑 짝하자..!
- 왜?
- ...어?
- 왜 나보고 짝하자는 건데?
생각보다 민수는 까칠한 면모가 있는 아이였다. 나보다도 누군가가 다가와서 말을 걸고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이 불편했던 아이였나 하고 지금에서야 되새김질해 본다. 민수의 이런 뾰족한 반응이 당황스러울 법도 했건만 우습게도 희철이의 호감 표현보다 민수의 가시 같은 반응이 타인에게 매달리는 관계만을 배운 어린 필자에겐 더 편안했다.
- 그냥! 그냥 나 너랑 짝할래. 짝하자. 그래도 돼? 그래도 되지?
- 아, 몰라. 맘대로 하던가.
그리고 그동안처럼 엄마에게 사랑을 달라며 떼를 부리듯 민수에게도 똑같이 나는 짝을 해달라며 떼를 부렸다. 그러자 민수는 나를 매우 귀찮고 짜증 나게 쳐다보면서도 어쨌든 야외 활동을 위해 짝을 지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랬는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옳게 된 수락과 관계 맺음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을 구분해 낼 리 없었던 어린 필자는 이렇게 생각했더란다.
어쨌든 나랑 짝 한다고 했잖아?
내 마음이 민수에게 통한 거야!
그러나 일방적인 관계 맺음은 당연하게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바보였던 거야?
야외 활동을 나가자마자 다른 아이들은 두 명씩 짝들과 함께 손을 잡고 한줄로 나란히 규칙있게 선생님을 따라갔지만 어째서인지 필자는 혼자였다. 민수와 짝을 맺었지만 민수는 내 손을 잡아주지도, 내 옆에 있어주지도 않은 채 줄을 이탈해 보도블럭 돌턱에 올라가 홀로 징검다리 타기 놀이를 하며 무리와 떨어져있었다.
- 민수야..! 민수야! 선생님이 짝이랑 손잡으라 했어!
- .....
- 민수야..! 일로 와! 친구들이랑 같이 줄 서야 되잖아!
나는 애타게 민수를 불렀지만 민수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 놀이에 정신 없었다. 그 순간 안되겠다 싶어 선생님을 부르려던 찰나 혼자 고군분투하던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 희철이랑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희철이의 눈빛도 이전과는 달라져있었다.
나를 좋아해주던 그 눈빛이 아닌 '그러게, 내가 짝하자 할 때 그냥 나랑 짝했음 이런 일도 없었잖아?'와 같은 안타까움 반, 우스움 반이 담긴 표정이었다. 필자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어 결국 선생님을 부르는 것도, 민수를 부르는 것도 포기한 채 유치원으로 돌아올 때까지 말 없이 혼자 걸었다.
그런 꼴 좋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아도 됐잖아...
왜 갑자기 유령 취급 하는 거야?
야외 활동에서 약간의 실망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원래 실수하면서 크는 것이라고 앞으로는 민수처럼 나를 안중에도 없는 아이 말고 나랑 놀고 싶어하던 희철이 같은 아이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날 이후로 희철이는 더이상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도, 같이 놀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희철이도 어린 아이였기에 내가 같이 짝을 안해줘서 잠시 삐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희철이는 남자 아이들과 무리를 만들더니 그 아이들하고만 놀기 시작했다. 이거 또한 여자 아이인 내가 희철이랑 짝을 하지 않겠다고 해버려 삐친 희철이가 일부러 남자 아이들과 노는 걸거라고 지레 짐작해버렸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인사하고 놀자고 해봐야지 하고 용기를 내보았다.
- 희철아, 안녕!
- ? 어. 응. 안녕.
예전에 맑고 순수하게 웃던 희철이는 나를 보자마자 굉장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억지로 내 인사를 받아주는 둥 마는둥 하더니 곧장 다른 남자아이들과 로보트 놀이를 하러 떠나버렸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는 나는 서글펐지만 한동안 무한 애정을 주던 희철이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적도 있었기에 낯설게 변해버린 희철이가 서운하면서도 내가 이미 배우고 알던 관계가 되어버려 납득해버리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되버렸다.
그래, 그럼 그렇지.
어차피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엄마처럼 나를 유령 취급 할 거면서.
그러나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밝고 직선적인 희철이의 마음을 밀쳐내고 상처 준 걸 수도 있었기에 이 결과는 필자의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긴.. 내가 먼저 싫다고 했잖아..
하지만 엄마에게 매달렸던 것과 달리 완전한 타인인 희철이에게는 나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딱히 없었기에 희철이가 왜 나에게 그렇게 돌변하여 행동하는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관계 개선을 포기한 채 그렇게 유치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심도있는 인간관계 활동을 하기에는 필자나 희철이, 민수 모두 지나치게 어린 것도 한몫했기에 그저 어린 시절의 기묘했던 하나의 에피소드로 지나가게 된다.
그렇지만서도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핵심 기억처럼 유치원 때의 일이 마음속 잔상에 남아 성인이 될 때까지도 계속 이성 관계를 마주할 때 필자의 서툰 태도와 의도치 않은 잘못된 색안경이 굳혀져 버리는 여러 계기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남자애들은 자기 멋대로 굴고 못됐어
다음 이야기에.
*표지 이미지 - 글쓴이의 개인 계정 AI 생성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