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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24. 2023

44. 위성통신 사업전략 II (2)

그날 저녁, 어느덧 차장으로 승진한 한호진 차장과 핵심고객관리 프로그램 프로젝트를 마친 허수민 차장까지 뉴욕에 도착했다. 추가 지원을 위해서였다. 


허수민 차장은 도착과 동시에 정 전무와 나 사이 냉랭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미국 인력들과 붙어 자료 정리를 돕겠다며 한발 빠졌다. 


결국 나는 한호진 차장과 함께 일해야 했다. 한호진 차장과 대면하는 건 대한통신 프로젝트 이후 처음이었다. 간간이 마주칠 때면 고개를 돌려 내 눈을 피한다거나 전화기를 보는 통에 인사를 건네는 정도가 전부였다. 아마도 나를 배신자 내지는 변절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IT로 커리어를 키우기 싫다며 대한통신 후속 프로젝트에서 빠졌고, 그 때문에 그가 혼자서 고생했다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할 건 또 뭐람? 


나도 그와 일하는 게 달갑진 않았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나의 ‘주적’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국내 MBA 프로그램의 첫 수혜자면서 특진 대상자는 다름 아닌 한호진 차장이었다. 이미 카이스트 MBA에 등록했고, 1년 간 프로그램 이수 후엔 부장으로 복귀할 예정이라 했다. 정 전무 지원을 받아 내가 박탈당했던 혜택을 고스란히 가져간 것이다.


한 차장은 무덤덤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작업을 시작했다. 나에겐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에 대한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넘겨달라고 고작 한 마디 건넸다. 불편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우린 말다툼 끝에 책상 한가운데 책가방으로 시선을 막은 짝꿍처럼 책상 칸막이를 두고 반나절이 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를 관찰할 필요는 있었다. 보나 마나 정 전무 편에 서서 나에게 칼을 겨눌 텐데 최소한 그가 뭘 준비하는지는 알아야 했다.


한호진 차장은 중간보고서 시나리오들을 살피며 메시지를 조절했다. 예를 들면 비관적 전개 시나리오에서 B2B 고객만 확보하면 기업가치가 마이너스 4조라는 분석결과에 기반해 ‘B2B 고객만 확보해서는 사업성이 없다’라는 메시지를 도출하는 식이었다. 정 전무는 분석결과를 왜곡하진 않을 거라 단언했지만 한호진 차장이 도출하던 메시지는 결국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 지지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나 역시 일단 정 전무 요청에 따라 6조의 기업가치가 나오게 되는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를 분석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가정을 수정하고 변수들을 조절해도 6조라는 기업가치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4G 세대교체였다. 시장 예상치보다 3년이나 빠르다고 작성된 라이트 사 전망치에 대한 근거가 부족했다. 그 어떤 연구 보고서를 봐도 라이트 사 전망치를 뒷받침할만한 데이터는 찾을 수 없었다. 


이틀 정도 골머리를 앓다 답답한 마음에 사무실을 나왔다. 늦은 오후 차량으로 가득한 맨해튼 거리를 따라 경적소리와 왁자지껄한 인파들 소음이 퍼졌다. 거리 끝자락엔 타임스퀘어의 화려한 전광판이 보였다.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어깨를 잔뜩 옹송그렸다.


“그러지 말고 만든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허수민 차장이었다.


“네?”


“’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 때문에 고민하시는 것 같은데 그걸 만든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 숫자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근거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그렇겠죠.”


잭.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허 차장 말대로 4G 세대교체에 대해 어떤 가정을 세웠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잭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잭을 만나겠다고 하면 정 전무에게 막힐 가능성이 높았다. 만나지 못하게 하거나 같이 만나 날카로운 질문은 사전에 차단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얘기를 안 하고 만나면 대놓고 항명하는 꼴이었다. 가뜩이나 프로젝트가 위태로운 상황인데 정 전무를 건너뛰고 독자행동을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럼 뭘 망설여요. 그냥 하시면 되죠.”


허수민 차장은 내게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5번가를 따라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맞다. 그냥 하면 되는데 뭘 망설이는가? 어쩌면 내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정 전무와의 관계 개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때 임정혁 이사 옆에 있던 치수처럼 정 전무 옆에 있는 한호진 차장이 되고 싶어서 말이다. 이번이 좋은 기회이긴 했다. 한번 부딪히긴 했지만 그가 요청한 대로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에 대한 근거만 잘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잡념을 떨쳐내듯 체머리를 흔들었다. 날 공채로 돌려 입사를 지연시키고 IT 프로젝트에 투입해 커리어를 가로막으려던 그였다. 지금 와서 타협이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 갈 길을 가야 했다. 


시나리오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건 잭을 통해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나는 곧장 사무실로 돌아가 잭에게 이메일을 썼다. 후속 논의를 위해 방문할 거라 선포했다. 조릿조릿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센트에 심지가 곧은 친구가 하나 있다고 하더니 오늘에서야 이렇게 뵙네요.”


잭은 빤드럽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내가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에 대해 회의적이란 건 현대통신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날 처음 보는 것처럼 자기소개를 하며 내 이름을 물었다. 지난 미팅 때 열명이 넘던 우리 쪽 참석자들 이름을 한번 듣고 모두 외워 불렀던 잭이었다. 내 이름을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나 역시 시작부터 기싸움을 걸어오는 그의 눈을 강단지게 쳐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세대별 이동통신 가입자 데이터를 띄워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요 이동통신사에게 받았던 네트워크 투자 계획과 이통사연합회에서 발표한 가입자 통계 데이터에 기반해 분석한 결과였다. 반박의 여지는 없었다. 잭은 내 설명을 듣기만 했다. 시종일관 미소는 잃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방어할 속셈이지? 직격탄을 날리고도 노심초사 긍긍대는 건 나였다.


짝. 짝.


발표가 끝나자 잭은 언죽번죽 웃으며 박수를 크게 두 번 쳤다.


“퍼펙트.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어요. 당장 저희 애널리스트 포지션으로 오퍼라도 드리고 싶네요.”


수럭스레 치렛말을 날리는 잭의 대응에 일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럴수록 멱살을 틀어쥐고 기세를 올려야 했다.


“별말씀을 요. 그래도 분석 결과 간 갭(gap)에 대해선 설명해주셔야겠습니다. 이대론 제대로 가치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어센트 분석결과대로라면 기업가치가 플러스가 되긴 힘들겠군요. 맞나요?”


“네.”


“제가 한번 맞춰보죠. 가입자 통계는 이통사연합회 자료를 주로 쓰고 가트너나 IDC 자료 같은 걸 참고하셨겠죠?”


“맞습니다.”


“그런데 그 자료가 어떻게 나오는 건지 아십니까? 버라이즌, AT&T, T모바일에서 사업계획을 세우면 이통사연합회에서 그 사업계획을 취합해 보정한 게 세윤 씨가 사용한 통계자료입니다. 하지만 라이트 사는 이통사연합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난 따지듯 잭을 향해 눈을 치떴다.


“통계에 라이트 사 사업계획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당연히 이 시장조사는 틀린 겁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전 세계 이통사들이 사업계획을 세울 때 핵심 데이터로 삼고 전자업계나 반도체 업계에서 까지 참고하는 게 이통사연합회 데이터였다. 그걸 대놓고 틀렸다고 말하는 당당함이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맵찬 안광으로 잭을 추달했다.


“시장조사가 틀리다니요?”


“세윤 씨는 저희 라이트 사가 하려는 걸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난 미팅 때 설명드린 것 같은데요. 저희는 시장 흐름대로 가면서 점유율이나 조금 가져보려고 사업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시장질서의 ‘전복’이에요. 없는 시장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겁니다. 조사 따위로 알아낼 수 있는 사업이 아니란 말입니다.


시장 예측치와 저희 예측치 사이 3년의 갭이 있다고 하셨죠? 그건 갭이 아니에요. 그게 바로 저희 사업계획입니다. 라이트 사가 4G 확산을 3년 단축시킬 거란 말입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이해는 합니다만, 통계라는 게 엄연히 수요에 기반해 나오는 건데…”


“아니요. 세윤 씨는 지금 제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시장 예측이나 통계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통계가 보여주는 미래는 현실의 연장에 불과해요. 전 현실을 잡아 늘려 미래라고 부르려는 게 아닙니다. 전 뒤집어엎고 자르고 꿰매서 새로운 미래를 재단하려는 거예요. 제 ‘비즈니스’를 만들려는 겁니다. 제가, 책임지고, 4G 확산을 3년 단축시킬 거예요. 그게 제 목표고 제가 마일스톤입니다. 제가 그렇게 할 거란 말입니다!”


머리가 쭈뼛 솟아올랐다. 그의 말씨가 가슴에 내리 박혔다. 그의 눈에서 발하는 앙칼진 확신은 바이러스처럼 내 전신을 뚫고 전파됐다. 무언가 나를 굳고 단단히 나를 속박하던 껍데기에 번개가 치듯 실금 한 줄기가 뻗어 나갔다.


“미스터 성세윤 씨, 컨설턴트면 과장이신가요? 이제 20대 후반쯤 되셨겠군요. 아직 사업 경험은 없으실 것 같고요. 주제넘은 얘긴지 모르겠지만 세윤 씨는 시야를 확장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크게 보세요. 세상은 넓답니다. 아직 젊으신 분이 왜 세상을 리서치 리포트가 규정한 틀 안에서만 생각하려는 거죠? 세상이 증권사 애널리스트나 통계청 직원들 예측대로만 굴러간다면 사업가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세윤 씨가 저희 라이트 사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시건 저는 상관없습니다. 현대통신에서 투자하지 않더라도 투자자는 찾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저는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윤 씨처럼 똑똑하고 젊은 분이 왜 이런 통계노름에 시간을 허비시는지 말이에요. 그 에너지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쓴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잭은 말을 마치고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통유리창을 통해 비치는 석양을 타고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드리웠다. 분명 분석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분석의 전제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의식과 사고는 분석 가능한 경계를 초월해 있었다. 


내가 일을 정말 제대로 한 건가? 나는 지금 나에게 걸어오는 이 사람이, 저 거대한 인간이 정말 사기꾼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가 밟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내 신념도 짓밟히는 것 같았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이 인간은 사기꾼이라 확신했는데 이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앞에서 싱긋 웃고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악수를 건넸다.


“나가는 길은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고 그는 내 등에 들으라는 듯 얘기했다.


“아, 그리고 오늘 오신 건 공식 방문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예를 들어 제가 현대통신에 어센트 성세윤 과장이 단독으로 연락을 해와 프로젝트에 대해 캐물었다고 하면 세윤 씨가 곤란해질까요? 현대통신 담당자는 오상식 전무였죠, 아마.”


난 발걸음을 즉시 멈췄고 황망한 얼굴로 잭을 돌아봤다.


“풋. 알겠어요. 오늘 일은 개인적인 방문이었던 걸로 해두죠. 대신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사람이 몇 년간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자연히 무언가가 쌓이게 됩니다. 처음엔 근육과 신경 조직에 쌓이다가 결국 뇌세포 하나하나에 까지 퍼져나가죠. 그걸 숙달됐다거나 통달했다고 하죠.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쌓인 경험들은 굳게 마련입니다. 하던 방식대로만 일하면 된다는 오만이 되고 같은 관점만 고집하는 편견이 되죠. 


제가 보기에 세윤 씨는 지금 오만과 편견에 갇혀 있습니다. 그걸 깨고 나오셔야 해요. 세상은 세윤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거대하답니다. 이 프로젝트를 보실 때 관점을 조금 더 넓혀서 봐주세요. 생각은 열어 주시고요. 


감히 말하자면, 세윤 씨가 지금 신념이라 생각하는 그 믿음이 혹 선입견은 아닐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록펠러 센터를 걸어 나오는데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잭의 주장에 빈틈은 없었다. 내 분석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잭은 내 분석 자체를 부정해 버렸다. 그는 분석으로 나오는 인사이트 따위는 그의 의지로 얼마든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확신으로 가득한 갈색 눈동자를 희뜩이며 말이다. 


그럼 내가 지난 수년간 컨설턴트로서 키워왔던 진실에 대한 믿음과 열정은 다 무엇이었을까? 한 문제에 집중해 분석하고 또 분석하면 근인에 다를 수 있다는,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그 믿음 말이다. 그 모든 게 한낱 탁상공론에 불과한 말장난이었을까? 


인파와 소음으로 가득한 맨해튼 거리가 텅 빈 듯했다. 라이트 사 가치평가에 대한 내 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허울뿐인 사기꾼에게 농락당한 걸까 아니면 희대의 혁신가에게 영감을 받은 걸까? 내가 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소신일까 아집일까? 


고개를 들어 록펠러 센터 빌딩을 올려봤다. 저 높은 빌딩 꼭대기 층에 서있을 잭과 지금의 내 위치에 대해 생각했다. 잭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일까? 내가 여기서 양자도약을 하듯 그가 있는 곳까지 뛰어오를 순 없을 까? 나를 속박하는 거센 중력과 관성을 떨쳐버리고 말이다. 


‘그건 제 목표고 제가 실행할 마일스톤인 겁니다. 제 비즈니스란 말입니다.’ 


확신 가득한 잭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내 ‘비즈니스’는 뭘까? 아직 그게 뭔진 몰랐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절대 그걸 찾을 수도 이룰 수도 없었다. 깨부수고 약진해야 했다. 추락하더라도 비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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