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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22. 2023

42. 위성통신 사업전략 I (4)

“이대로 보고할 수 있겠어요?”


진이 임 이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들의 대화를 어깨너머로만 듣던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팩트를 모아 자명한 분석결과를 내놓았는데 보고를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 의미는 하루 뒤 현대통신 박상우 차장과 석식을 하며 알 수 있었다.


박상우 차장은 어센트 출신으로 5년 전 현대통신 네트워크 운영팀으로 이직했다. 임정혁 이사 와도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고, 프로젝트 초기부터 잭 팔콘과 미팅을 잡아주고 모건스탠리나 맥킨지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도 전달해 주며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맨해튼 32번가에 있는 한식당에 방을 잡은 우리는 단출히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내가 고기를 굽기 시작하자 박 차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중간보고 이대로 하실 거예요? 아까 오 전무님이 얘기하신 대로 바꾸는 게 어때요?”


“저희 분석 결과는 이미 나왔어요. 내부 검토도 끝났고 미국 파트너들도 다 동의한 내용인데 임의로 바꾸진 못해요. 박 차장님이 이해 좀 해주세요.”


임 이사는 오늘 오후 중간보고 내용을 사전 공유하겠다며 뉴저지에 있는 현대통신 미국 지사에 방문했었다. 우리가 분석한 내용을 전달하며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임 이사는 이마에 잔뜩 먹구름을 드리운 채 돌아왔다. 박 차장이 저녁을 같이 하자며 전화한 것도 그쯤이었다. 


오 전무는 누구고 또 그가 임 이사에게 했던 얘기는 뭘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박 차장과는 겨우 인사 몇 번 한 게 다였던 내가 대화에 끼기엔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고기를 뒤집으며 빈말이라도 던져볼까 하려던 찰나 김 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 차장님. 이번 보고자료는 저희가 발로 뛰면서 수집한 팩트를 바탕으로 만든 자료입니다. 사실관계 확인은 모두 끝냈고 메시지도 최대한 편향된 부분 없이 중립적으로 작성한 겁니다. 저희가 누락하거나 검토하지 못한 데이터가 추가로 나오지 않는 한 자료에서 바꿀 부분은 없어요.”


순간 박 차장은 면을 일 그리며 젓가락을 ‘탁’하고 식탁에 올려놓았다. 나는 고기를 뒤집던 손을 멈췄고, 임 이사도 굳은 얼굴로 이마를 쓸어내렸다.


“바꿀 수 없다는 얘기신가요?”


“보고서에 대한 책임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어센트 한국 사무소와 미국 사무소가 합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고 양사 대표가 모두 합의해 만든 보고서 내용을 저희 임의로 바꿀 순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어떤 근거로 저희 미국 전문가들이 분석한 내용을 바꿀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아요.”


다시 김한겸 부장이었다. 그는 무거운 분위기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박 차장과 불똥이 튈 듯 눈을 마주치며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김한겸 부장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임 이사가 급히 제동을 걸었다.


“자자, 먼저 드시면서 하시죠. 그보다 아까 전화로 하셨던 얘기 좀 해주세요. 다른 펌들에선 내용을 어떻게 바꿨다는 거예요?”


박 차장은 입술을 지그시 한번 깨물고는 불판을 바라봤다. 노릇하게 익은 고기 냄새가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알겠습니다. 드시면서 하시죠. 다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젓가락질을 몇 번 하던 박 차장은 불판 위로 문서 한 장을 건넸다. 임 이사는 30여 페이지 되는 보고서를 빠르게 넘겨보다 한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곁눈질로 보니 가치평가 장표였다. 


모건스탠리, 맥킨지와 분석 범위는 달랐지만 시나리오 옵션과 가치평가 부분은 내용을 맞추기로 했었다. 모건스탠리는 재무, 맥킨지는 사업전략 그리고 어센트는 기술투자 측면에서 검토를 진행하고 결과물은 박상우 차장 쪽에서 하나로 취합하기로 협의했던 것이다. 한데 그들 보고서에는 전에 없던 시나리오가 턱 하니 추가되어 있었다.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를 추가했군요.”


임 이사의 말에 박 차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 차장이 보여준 건 모건스탠리와 맥킨지에서 작성한 중간 보고서였다. 


그들의 보고서는 사뭇 달랐다. 우리만큼 신랄하게 잭의 허황된 꿈을 파헤쳤을 거란 추측을  깨고 과도하리만큼 낙관적이었다. 리스크를 언급하긴 했지만 성공하면 큰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데 더 초점을 맞췄다.


“원래는 그 보고서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오 전무님께 사전보고를 하다 바꾼 겁니다.”


오 전무 말 한마디에 ‘혁신적 전개’라는 시나리오를 추가했다고? 정보력과 분석력이 우리보다 떨어지는 건가 아니면 줏대가 없는 건가?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는 라이트 사의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모두 수용해야 만들 수 있는 허황된 시나리오였다. 특히 4G 도입이 모든 시장 예측치를 초월해 3년은 빨라진다는 소설 같은 가정을 말이다. 모건스탠리와 맥킨지가 그런 가정을 수용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보고서가 이렇게 나온 건… 이 프로젝트가 VIP 아젠다기 때문입니다.”


“VIP 어젠다라뇨?”


“VIP가 직접 추진하시는 프로젝트란 말입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자체가 이미 37층에서 사전 검증을 했

다는 얘긴데, 지금 작성하신 보고서가 그대로 나가면 37층 업무를 통째로 반박하는 거예요. 37층 임원분들 전체가 불편해지시게 되는 겁니다.”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37층이라면 최연우 회장 비서실이었다. 날고 기는 인재들이 수두룩 할 텐데 애초에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게 한심스러웠다.


게다가 잘못된 사실을 알고도 바로 잡지도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고작 37층 임원들의 불편함을 고려해 수 백억 원의 투자를 단행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래서 투자를 단행하는 게  최연우 회장 의지라는 얘깁니까? 아니면 제대로 검토도 안 해보고 투자를 건의한 37층 임원들 의지라는 겁니까? 


아니, 답해주실 필요는 없겠네요. 어차피 저희 보고서 내용이 바뀔 이유는 없으니까 이대로 보고하면 명확히 드러나겠죠. 원금 회수도 못할 투자를 단행하려는 게 최연우 회장인지 37층 임원들인지요.”


옆에서 듣던 김한겸 부장이 비꼬듯 말했다. 박 차장은 반사적으로 눈을 치뜨며 김 부장을 꼬나봤다. 불판보다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래봤자 컨설팅 보고서 아닙니까! 이건 현대통신이 진행하는 사업입니다. 판단은 현대통신이 하는 거란 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합니까? 저흰 보고서를 책임지고 쓰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희가 수집한 팩트와 분석한 결과를 기반으로요. 얘기하신 대로 그 보고서를 보고 투자를 판단하는 건 현대통신 몫이고요. 그러니 투자는 마음대로 하셔도 보고서 내용에 간섭하진 말아 달란 얘깁니다.”


“그 만들 하시죠. 박 차장님 얘기는 잘 알겠습니다. 라이트 사에서 노골적으로 데이터를 부풀렸다거나 기존 분석이 잘못됐다는 톤의 내용은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결론이 크게 바뀔 것 같진 않지만 보여주신 모건스탠리나 맥킨지 보고서와 최대한 톤을 맞추도록 하죠.”


임 이사가 중재하듯 끼어들었다. 임 이사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를 추가하겠다는 확답은 주지 않았다. 가치평가 결과에 대한 해석과 톤을 중의적으로 다듬겠다고만 했다. 집요하게 요청하던 박 차장도 결국 포기했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리 분석에 오류는 없었다. 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 (GSME, 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s Association) 데이터베이스를 비롯해 가트너나 IDC와 같은 공신력 있는 리서치 기관 리포트는 모두 섭렵했고, 버라이즌이나 AT&T의 내부 투자 계획서까지 검토했다. 


그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테라글로벌에서 작성한 라이트 사 가치평가 모델을 라인 바이 라인으로 검토해 내린 결론이었다. 라이트 사의 최대 가치는 반박할 여지없이 마이너스 오 억불짜리 ‘낙관적 전개’ 시나리오였다! ‘혁신적 전개’는 망상에 불과했다.


임 이사나 김 부장이 소신을 굽히지 않는 건 아마도 분석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 수많은 자료와 데이터 사이 진리란 존재했고, 결연하고 끈기 있는 질문과 분석을 통해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게 그동안 내가 컨설턴트로서 일하며 얻은 확신이었다.


박 차장과 미팅이 끝난 후에도 논쟁은 쉽게 종결되지 않았다. 진과 아트 역시 현대통신 임원들과 논의한 후 보고서 내용을 바꿔야 할지 고민했고, 임 이사, 김 부장과 함께 반나절 넘게 회의실에서 앉아 한국과 미국 각지에 있는 헤드파트너들과 컨퍼런스콜을 이어갔다. 


나에겐 그런 대화에 낄 틈이 없었다. 중간보고를 위해 보고서 톤을 조정하고 분석결과에 대한 로직을 견고히 만들어 놔야 했다. 마이너스라는 가치평가 결과가 공개되는 순간 잭과 현대통신 임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받을 게 뻔했다. 소수점 자리 숫자도 틀리면 안 됐고 데이터도 모두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지난 일주일 간 매일 같이 밤을 새우며 준비했다.


중간보고 3일 전, 현대통신 오상식 전무와 최종 리뷰가 있을 예정이던 날 아침 임정혁 이사가 호텔 로비에서 잠깐 보자며 전화가 왔다. 보통 나보다 먼저 출근해 미국 인원들과 업무를 시작하던 임 이사였는데 뭔가 이상했다. 허둥지둥 출근 준비를 해 로비로 내려가보니 임 이사는 정장이 아닌 청바지 차림으로 라운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성 과장님.”


“네.”


“저 오늘 한국 들어갑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임 이사는 토끼눈을 뜨고 있는 날 보며 겸연쩍게 눈웃음을 지었다. 입가에 보이는 씁쓸함은 억지미소로 덮었다.


“네? 갑자기 한국이라뇨?”


“중요한 제안 작업이 하나 생겼는데 인원이 없다고 하네요. 이 대표님이 직접 부르시는데 안 갈 수가 없게 됐어요. 김한겸 부장도 오늘 저와 같이 들어갈 겁니다.”


“네? 김 부장님까지요? 그럼 프로젝트는요?”


“새로 인력이 투입될 겁니다. 몇 분 논의되는 분이 계시긴 하는데 어느 분이 오실진 아직 몰라요.”


“중간보고는요? 중간보고는 어떻게 하죠?”


“연기될 겁니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 임 이사는 퇴출됐다. 아마도 오상식 전무가 담당자 교체를 요구했을 것이다. 프로젝트 결과가 마음에 안 들어 보강을 요구하거나 애프터서비스를 요청하는 경우는 봤어도 프로젝트 중 담당자 교체를 요구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었다. 


모른 척 제안서 때문에 귀국한다는 임 이사의 얘기에 맞장구를 쳐줘야 하나? 아니면 오상식 전무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위로를 해드려야 하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저도 컨설팅을 10년 넘게 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임 이사는 내 얼굴에서 생각이 빤히 읽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현대통신 37층에 있을 그 어떤 임원보다 인사이트 있고 라이트 사의 사업 가치에 대해 깊게 고민한 임정혁 이사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는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지금 이 상황에 누가 투입돼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간단 말인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혼란스럽기만 한 상황에서 임정혁 이사와 김한겸 부장은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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