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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23. 2023

43. 위성통신 사업전략 II (1)

“네? 정주성 전무요?”


난 수화기에서 귀를 떼지 못하고 한참을 우두망찰 서있었다. 임정혁 이사를 대신해 교체 투입될 담당자는 분명 정주성 전무라고 했다. 말이 안 됐다. 정 전무는 통신 전문가이긴 하지만 M&A나 실사 프로젝트 경험은 없었다. 가치평가 결과를 이해시키는 데만도 한참이 걸릴 터였다. 역량도 없는 그가 왜 이 프로젝트에 들어온단 말인가? 


이미 결정은 나있었다. 내일 JFK 공항에 도착하는 건 정주성 전무였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머리 한쪽으론 음모론이 솔솔 피어올랐다. 이 모든 게 현대통신 어카운트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정 전무의 책략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몇 군데 찔러보니 과연 이주완 대표가 직접 오려던 걸 정 전무가 말렸다고 한다.


현대통신에서 문제 제기를 한 순간 본인이 소방수를 자처하며 공적을 쌓고 싶었던 것이다. 현대통신 어카운트를 장악하고 이주완 대표까지 견제해 어센트를 IT로 물들이려는 검은 속내가 선연히 그려졌다. 이주완 대표 곁을 지키던 임정혁 이사와 김한겸 부장까지 한방에 보내버렸으니 그에게 더 이상 걸림돌은 없었다. 


아니, 잠깐. 어쩌면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젠장! 설마 정주성 전무가 노리는 게 총괄 대표 자리는 아니겠지? 도대체 그악스러운 탐심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정주성 전무가 맨해튼에 도착한 건 정오쯤이었다. 나는 한때 임정혁 이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중간보고서를 한 부 뽑아서 올려놨다. 정 전무는 보고서를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후 내내 현대통신 임원들을 만나러 다녔고, 저녁 느지막이 사무실에 들어와 보고서를 들춰 보고는 오상식 전무와 저녁 약속이 있다며 다시 나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만 바라봤다. 진을 비롯한 외국인력들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모두 일찌감치 퇴근하거나 다른 일을 했다. 밤 10시가 되도록 정상무는 들어오지 않았고 사무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30분쯤 더 지나고 노트북을 덮으려는데 정 전무가 들어왔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비치적거리는 발걸음 만으로도 그가 뭘 하고 왔는지 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성 과장, 아직도 있었네.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세요. 내일 얘기합시다.”


쓰라린 위액이 식도를 타고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애써 집어삼켰다. 정 전무의 동공은 이미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풀려있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두 다리를 올렸다. 


곧, 거친 숨소리를 따라 복부에 가지런히 포개 올린 정 전무의 두 손이 위아래로 울렁였다. 잘 거면 그냥 호텔로 들어갈 것이지.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정 전무는 사무실에 오자마자 아트를 불러 라이트 사 사업에 대해 제대로 분석한 게 맞냐며 다그쳤고, 케빈에게도 버라이즌과 AT&T의 네트워크 투자 계획을 다시 검토해 보라 말했다. 


그는 말하는 종종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를 언급했다. 마이너스 5억 불짜리 사업이 순식간에 그 열 배가 넘는 가치를 지닌 사업으로 둔갑하는 마술 같은 시나리오 말이다. 정 전무는 미국 인력들과 얘기를 모두 끝낸 후에야 나를 불렀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 다 들으셨죠?”


“…”


“프로젝트 방향을 틀어야 해요. 중간보고까지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세윤 씨가 고생 좀 해줘야겠네요. 자료 조사나 분석은 각자 하더라도 보고서로 취합하는 건 세윤 씨가 해줘야 하니까요.”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중간보고에 쓸 자료 조사와 분석은 이미 끝났는데요.”


정 전무는 예기치 못한 답변과 내 태도에 잠시 당황하다 바로 상황을 각찰한 듯 턱 밑으로 거칠게 솟아오른 터럭을 쓸어내렸다. 그 말 한마디로 정 전무와 관계는 정리됐다. 이제 나에게 특진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본인이 구원투수라도 되는 냥 단박에 결론을 번드치려는 그의 만행을 달관할 순 없었다. 그가 교오한 침묵을 깬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세윤 씨도 아시겠지만 모건스탠리와 맥킨지는 저희와 정반대의 결론을 냈습니다.”


그랬다. 그들은 오상식 전무 말 한마디에 ‘혁신적 전개’라는 시답잖은 시나리오를 추가했다. 당장이라도 그 엉성궂은 녀석들에게 우리 데이터와 분석 결과를 드밀고 싶었다.


“그들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결론을 내렸을까요? 저희가 그들보다 정보력이 뛰어나다거나 더 깊은 인사이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만이에요. 저희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금처럼 결론을 내린 데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글쎄, 그게 뭘까요? 이미 분석과 데이터 검증은 할 만큼 했는데 뭘 더 해야 하죠?


“그러니까… 한 회사를 움직이는 건 어디까지나 총수입니다. 회장의 의중이 중요한 거죠. 박상우 차장에게 들었겠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회장 어젠다예요. 이변이 없는 한 투자에 대한 의사결정은 이미 내린 상황일 겁니다. 중요한 건 방향을 바꾸는 게 아니라 방향대로 실행할 안을 찾는 거예요. 그게 이 프로젝트에서 저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격한 울렁임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며칠간 밤을 새우며 이게 진실이고 팩트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분석했던 기업가치를 총수 말 한마디에 뒤집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진리라 믿었던 모든 건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 게 된다. 


진리는 팩트와 데이터에 있다며 항상 비판적으로 의심하고 탐구하라던 임 이사의 말이 메아리처럼 뇌리에 울렸다.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화살을 있는 힘껏 비틀어 날렸다.


“전무님. 그럼 애초에 이 프로젝트는 왜 시작한 겁니까? 사업의 성패가 정말 총수 의지에 달린 것이고 그 의지에 따라 기업가치가 결정되는 거라면, 그냥 진행하면 되겠네요. 실사는 왜 하고, 분석은 왜 합니까? 저희 프로젝트 목적은 실행방안을 찾는 게 아니라 실행하는 게 맞는지를 답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정 전무는 눈을 희번덕이며 날 쏘아봤다. 책상 위에 올린 손은 꽉 그러쥐었다. 그리곤 몰강스레 호통쳤다.


“그래서, 세윤 씨는 라이트 사의 기업가치가 마이너스 5억 불이라고 확신합니까? 라이트 사가 사업을 하면 잘해야 5억 불 손해라고 확신하시냔 말입니다. 그 확신, 책임질 수 있습니까?”


“그건, 분석 결과가 그렇게…”


“전 분석결과를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세윤 씨의 판단과 책임을 묻고 있는 겁니다. 나는 컨설턴트일 뿐이고 현금흐름할인법에 따라 가치평가를 했더니 기업가치가 마이너스 5억 불로 나왔습니다,라고 단순히 던져선 안됩니다. 


기업가치가 마이너스 5억 불이라고 박상우 차장과 오상식 전무를 설득하고, 회장실 임원들을 설득하고, 또 최연우 회장을 설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윤 씨는 분석결과는 마이너스 5억 불이니 설득은 저보고 하라고 얘기하는 겁니까?”


“…”


“이 사업은 전적으로 현대통신의 사업입니다. 기업가치가 마이너스 4억 불이건 6억 불이건 사업에 대한 책임은 최연우 회장에게 있어요. 그가 이 사업을 6억 불 가치로 키우겠다 마음먹었다면 그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우리 일인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마이너스 5억 불이란 저희 분석 결과를 숨기거나 왜곡하자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얘기하는 건 6억 불의 가치가 어떻게 가능할지 그 시나리오도 보여주자는 것뿐입니다. 그게 이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담당자로서 제가 세윤 씨에게 요청드리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쌜룩 볼에 바람을 넣었다. 단순히 분격해 내뱉는 광언망설이라면 얼마든 반박하겠지만 정 전무의 언변은 거칫하면서도 정연했다. 그의 요청은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가 타당하다 억지 부리는 게 아니라 어떻게 가능할지 그 조건을 제시하자는 거였다.


“성 과장님, 전 임정혁 이사님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략 소속도 아니고 전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해요. 하지만 제가 프로젝트 담당자가 된 만큼 저를 믿고 따라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없이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어요. 


임정혁 이사님이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분이시고 저보다 몇 배 능력 있는 분이시지만 저는 이 프로젝트를 임 이사님과는 다르게 풀려고 해요. 임 이사님 어프로치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고, 문제를 푸는 방식이 다른 겁니다. 


저는 철저히 고객사 측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맞춰보려고 합니다. 제가 프로젝트를 맡게 된 건 그런 방식으로 이 프로젝트를 리드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세윤 씨도 제 방향대로 따라와 주셔야 합니다.”


 ‘라이트 사의 합당한 가치’라는 정답보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하자, 이건가? 여전히 정 전무의 말에 설복된 건 아니었다. 방향이 잘못됐다면 그걸 지적하는 것 또한 우리 역할이 돼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논리나 비판적 사고와 같은 컨설턴트의 자질은 어떤 의미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제안을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컨설팅은 엄연히 서비스 업이고 그렇다면 고객사 요청에 맞추는 게 옳은 방법이긴 했다. 어떻게든 우린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서 실사 보고서를 전달해야 했고, 현대통신에서 만족할만한 보고서를 전달하려면 정상무가 제안한 대로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에 대한 견해도 줘야 했다. 정 전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제 마무리하자는 듯 말했다.


“지금부터 분석 목표는 투자금 회수 가능 시나리오에 대한 조건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 번째 시나리오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디테일을 정리해 주세요. 예를 들면 베스트바이와 같은 대형 B2B 고객사 발굴을 위해 B2B 영업조직을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진과 케빈에게도 얘기해 뒀으니 도와줄 겁니다. 그리고 비관적 전개 시나리오에 사용된 가정들은 사업과 관련된 위험요소로 정의해 주세요. 사실 4G 도입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도입률이 현재 라이트 사 예측치보다 낮아지는 건 팩트가 아니라 위험요소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대비책도 정리가 돼야 할 것 같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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