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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25. 2023

45. 위성통신 사업전략 II (3)

“세윤 씨, 가치평가 결과는 모건스탠리와 맥킨지 결과와 맞추기로 했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하고 저녁 느지막이 정주성 전무가 장표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한호진 차장이 최종 덱 취합 작업을 갈무리한 것 같았다. 결과물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역시나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를 추가했다. 상의 한 마디 없이 이렇게 정리해 버리면 어떡하냐고 반사적으로 입이 열리려는 순간 잭의 눈빛이 떠올랐다. 이건 자기 비즈니스고 자신은 그렇게 사업을 성공시킬 거라고 확신에 차 말할 때의 그 눈빛 말이다. 


‘혁신적 전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일까? 확신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 전무는 내 망설임을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를 추가하긴 했지만 이게 ‘가장 가능성 높은’ (Most Likely) 시나리오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오늘 현대통신에서 저희와 모건스탠리, 맥킨지를 모두 불러 추가 회의를 했어요.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현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는 점에 동의했죠. 저희가 자문그룹 관점에서 의사결정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도요. 


그래서 현대통신에서 투자심의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각 자문사 별로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와 의견을 제시하면 심의회에 참석한 현대통신 임원들 간 투표로 최종 결정이 날 거예요. 공정한 의견 청취를 위해서 외부 인원은 통제될 거고 각사 대표 인원이 한두 명씩 참석해 질의하는 식으로 진행될 겁니다.”


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새로운 전개였다. 심의회를 열고 참석자를 통제해 사전에 모든 변수를 차단하겠다는 속셈인가? 나로서는 지금까지 분석결과를 주장할 일말의 가능성마저 상실한 셈이었다. 다리엔 힘이 풀리고 나도 모르게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졌다. 


이젠 상관없었다. 분석은 끝났고 공은 내 손을 떠났다. 정 전무가 심의회에서 무슨 말을 할진 불을 보듯 뻔했다. 모든 게 정 전무 뜻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쓰러지기 전 카운터펀치라도 날려야 하는데 이미 잭에게 한방 먹어서 인지 주먹조차 쥘 수 없었다. 


그래, 되지도 않는 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마음 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지면 정말 마음이 편해질까? 나중에 후회는 없을 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정 전무가 정적을 깨고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한 마디를 던졌다.


“심의회는 3일 뒤니까 맞춰서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자료나 분석이 더 필요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건 알아서 준비하셔야죠.”


“네?”


“그런 건 참석 당사자가 알아서 준비해야죠.”


“아, 네.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자료 준비해 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난 정 전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정 전무를 보자 정 전무는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 말했다.


“세윤 씨예요, 심의회에 참석할 어센트 대표.”


“네? 저요?”


“어센트에선 진과 세윤 씨, 이렇게 두 분이 참석합니다. 세윤 씨가 모델링 실무를 담당하셨으니 저보단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으실 겁니다. 그리고 오늘 잭 팔콘이 직접 세윤 씨 참석을 추천했다고 하더군요. 의견은 소신껏 분석하신 대로 제시하시면 됩니다. 그게 취지니까요.”


“잭이, 요청했다고요?”


“그래요. 가장 분석을 많이 한 건 어센트 모델링을 하신 분인 것 같다고 그분이 참석하면 좋겠다고 추천했다네요. 뭐,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심의회는 3일 뒤니까 맞춰서 준비해 주세요.”


내가 심의회에 참석하게 됐다니. 쟁쟁한 현대통신 임원들 앞에 서 회장이 직접 추진하는 프로젝트를 죽일지 살릴지 얘기하는 게 바로 나였다. 전순간 폭퐁우 같은 전율이 신경계를 휩쓸며 손톱 끝 세포까지 자극했다. 


바로 지금이었다. 내가 정 전무에게 제대로 한방 먹일 수 있는 기회. 그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한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어센트를 장악하기 위해, 아마도 현대통신과 ICT 세미나를 열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을 정 전무의 길고도 치밀한 계획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내게 굴러 들어오다니! 


칼은 손에 쥐어졌고 적의 치부도 노출됐다. 미국 이동통신 시장의 진화 속도를 3년이나 앞당길 수 있다는 잭의 허황된 가설만 들쑤시면 됐다. 한데 칼을 그러쥔 손은 부르르 떨리기만 할 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 따위 프로젝트는 갈가리 찢어 쓰레기통에 쳐 박아 버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난 그 자리에서 얼음장처럼 굳어 버렸다. 입은 재갈을 물린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어깨는 천근 쇳덩이가 올려진 듯 무거워졌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비열하고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잘 벼려진 검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이 검을 양손으로 치켜들고 조용히 정 전무 옆에서 그의 호위무사가 되는 방법도 있었다. 그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 순간,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는 거다! 어센트를 장악할 막강한 힘을 지닌 그에게 말이다. 


목젖이 울렁이며 침이 넘어갔다. 고개를 휘저었다. 내 인생 최악의 빌런 정주성 전무의 호위무사라니. 말도 안 됐다. 나를 이런 상황까지 몰고 온 게 그였고, 그는 내 주적일 뿐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으면서, 이제와 내게 칼을 건네는 이유는 뭘까? 성세윤은 안된다고, 아직 너무 주니어니 본인이 심의회에 참석하겠다 밀어붙이면 될 걸 말이다. 


어쩌면 이거야 말로 정 전무의 계략인지도 모른다. 내가 종국에는 호위무사를 자처할 거란 사실을 알고 나를 전면에 내세운 거다. 그럼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본인은 책임을 회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다, 정 전무가 빌런이긴 해도 비겁하고 졸렬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 왜 내가 심의회에 참석하는데 동의한 걸까? 수많은 추측과 망상들이 얽히고설히며 더 이상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프로젝트를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정 전무란 줄을 잡을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날 저녁, 밤 느즈막에서야 작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한 차장이 날 불렀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날 기다린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체도 안 하더니 내가 심의회에 참석한다니 할 말이 생긴 모양이다. 


한 차장이야 정 전무와 이인삼각을 뛰는 관계니 한 차장에게도 이 프로젝트가 중요하긴 할 것이다. 정 전무가 어센트를 장악하면 한 차장도 정 전무 오른팔로 한 자리 꿰차는 입장이 되지 않겠는가. 한 차장만큼은 그런 정치게임과는 무관하다 생각했는데 실망이었다. 하긴, 그러니 MBA도 지원받고 특진 대상자 물망에 올랐겠지.


“심의회, 참석한다면서요? 어떻게 의견 제시할지 생각은 해봤어요?”


“제가 뭐 제시할 의견이랄게 있나요. 그냥 분석결과만 얘기하는 거죠.”


“정 전무님 하고 따로 얘기하신 건 없으셨어요? 그래도 정 전무님 의견을 들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글쎄요, 정 전무님은 그냥 제 소신껏 하라고만 하시네요.”


“그래도 생각하시는 방향이 있을 테니 한번 물어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방향은 오히려 한 차장이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요? 혹시 들으신 게 있으세요? 전무님과는 부장님이 더 가까우시니까.”


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우선 그의 속을 떠보기로 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정 전무님은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 쪽에 무게를 두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럼 그렇지. 충분히 예상했던 얘기였다.


“왜요? 보고서 보셨겠지만 전 그게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가 가능하지 않다는 건 세윤 씨 ‘의견’ 아닌가요? 의견 제시는 안 한다면서도 굉장히 확고한 의견을 갖고 있네요.”


“의견이 아니라 분석 결과입니다. 확고한 의견이 아니라 엄연한 팩트인 거죠.”


분석결과에는 자신 있었다. 가뜩이나 생각이 복잡한 와중에 그에게 예의를 갖추거나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한 차장은 검지 손가락을 뻗어 입술 주위를 긁적였다. 그도 분명 이 대화가 쉽지 않을 거란 걸 감지했을 것이다.


“좀 걸을 까요? 계속 사무실에만 있었더니 갑갑하네요.”


한 차장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호텔 방향으로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텔까지 15분 정도 걷는 동안 한 차장은 날이 춥다느니 그래도 맨해튼 거리엔 사람이 많다느니 하며 소소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잽을 던지며 이제 곧 시작될 본 게임에 앞서 체력을 비축해 놓으려는 듯 말이다.


“가볍게 맥주 한 잔 어때요? 멀리 갈 필요 없이 로비바에서요.”


호텔에 도착할 즈음 한 차장이 말을 꺼냈다. 선전포고였다. 나로서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성 과장하고 대한통신 프로젝트한 게 엊그제 것 같은데, 전략에서 트레이닝을 정말 잘 시키긴 하나 봐요. 보고서는 깔끔하던데요.”


“아닙니다. 부장님 하고 일할 때 많이 배웠죠. 그 뒤로 IT 프로젝트는 못해봤지만요.”


난 한껏 비꼬아 말했다. 한 차장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세윤 씬, 아직도 IT 싫은가 보네요?”


“제가 언제 IT를 싫어했었나요? IT보다는 전략을 더 좋아할 뿐이죠. 프로세스 디자인이나 시스템 분석 그런 것보다는 분석하고 스토리 만드는 게 더 적성에 맞긴 하더라고요.”


“그렇겠죠. 그래도 분석이나 스토리 같은 게 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전략이 좋긴 한데 한계는 엄연히 있어요. 속된 말로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한다고 할까요. 이번 프로젝트도 너무 전략적으로 접근해서 탁상공론만 얘기하는 건 아니면 좋겠어요.”


“전략 탓에 뜬구름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실무가 전략을 이해 못 하거나 실행할 역량이 없을 때 그렇게 되는 거죠. 그건 엄연히 실무의 한계죠.”


“실무의 한계가 아니라, 전략을 이해시키지 못하고 실행하도록 설득하지 못한 전략의 한계라는 생각은 안드

시나요?”


“컨설턴트가 실무의 이해력까지 챙겨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차장은 풋 하고 가볍게 웃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넌 역시 그런 놈이라며 조소 섞인 눈초리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가치판단 때문에 내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었다. 난 당당히 눈을 부릅뜨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 역시 내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제일 중요한 건 일이 되게 하는 거 아닌가요? 컨설턴트, 아니 그 누구라도 혼자 일 할 순 없습니다. 전략이 진정 뜬구름이 되지 않으려면 실행하는 사람들의 역량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일을 되게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 되야죠. 컨설턴트라고 본인 역할을 컨설턴트에 국한시켜선 뜬구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세윤 씨가 본인 분석이 맞다고 주장하는 건 이해하겠어요. 아니, 백 프로 동의합니다. 분석이야 당연히 전문가답게 하셨겠죠. 제 말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컨설턴트라고 컨설턴트의 역할만 고집한다면 그건 아집에 불과해요.”


쳇. 아집이라니. 컨설턴트가 그럼 컨설턴트 역할을 하지, 뭘 하란 말인가?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왜 이런 설교를 들어야 하는 건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의문이 들었다. 난 정말 한 차장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엔리코, 신지성 사장, 유재필 사장, 잭의 모습이 차례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평범한 다수를 움직여 보겠다던 치수의 모습까지 말이다. 그들이라면 한 차장 말에 어떻게 반응할까? 난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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