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세윤 Jul 26. 2023

46. 위성통신 사업전략 II (4)

한 차장은 냉랭해진 분위기가 머쓱했는지 견과류가 담긴 접시를 한 번 휘저었다. 우린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아까 왜 정 전무님이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 물으셨죠?”


정적을 깨고 한 차장이 물었다. 나는 예, 하고 짤막히 답했다.


“전무님은 컨설턴트로서가 아니라, 어센트 전무로서 그렇게 얘기하신 거예요. 아시겠지만 정 전무님은 논리나 분석 같은 것에 그렇게 신경 쓰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실제 결과가 고객사나 저희에게 미칠 영향만 생각하고 행동하시죠. 


전략 사람들이 보기엔 즉흥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근거 없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닙니다. 어센트에서 그 누구보다 전략적인 게 정 전무님이십니다. 이번 결정도 어센트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있어서 그렇게 밀어붙이시는 거고요.”


잠잠했던 속이 다시 욱하며 끓어올랐다. 이게 어떻게 어센트에 도움이 된단 말인가? 당장 면피는 할 수 있겠지만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궁극적으론 해가 되는 일이었다. 


만약 내 추측대로 정 전무가 총괄대표 자리까지 노리고 있다면 말이 됐다. 어차피 정 전무는 총괄대표 선출 때까지만 주도권을 쥐면 되니 나중 일은 상관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어센트에 도움 되는 게 아니라 정 전무 본인에게만 도움 되는 일이었다.


“어센트에 도움이 된다고요?"


“그래요. 그래야 후속 프로젝트가 나올 테니까요.”


난 한 차장의 말에 눈이 치떠졌다. 이제야 속을 보이는 군. 이거야 말로 한 차장이, 그리고 정 전무가 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이다. 결국 현대통신 회장실에 잘 보여 후속프로젝트를 따고 결국 현대통신 어카운트를 가져가면서 어센트 총괄대표 자리까지 노려보겠다는 의도였다. 


이주완 대표부터 임정혁 이사, 김한겸 부장까지 ‘실패자’로 낙인찍고 본인이 올라서겠다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이자, 어센트나 현대통신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되든 일단 본인 목적을 이루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의도였다.


이로서 한 차장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으로, 정 전무와 같은 부류의 인간으로 타락한 걸 인정하고 말았다. 그래도 한 차장만큼은 객관적으로 분석 결과를 봐주리란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모두 부질없었다. 그 역시 속물이었다.


“후속 프로젝트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토록 고생을 해서 논리를 빡빡 히 세워서 분석한 결과물을 단번에 뒤집을 만큼요? 후속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면 대한통신에서처럼 몇 백억짜리 프로젝트를 띄울 수 있어서요?”


“맞아요. 뭐 부정하진 않겠어요. 사실 정 전무님도 그렇고 저도 실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후속 프로젝입니다. ‘차세대 ICT 플랫폼 구축’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앞으로 3년은 안정적으로 매출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어센트엔 그게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고요.”


“어센트가 아니라 정 전무님과 IT조직에 필요한 상황이겠죠!”


그리고 한 차장 당신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잠깐만요. 세윤 씨 지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요—”


“오해하는 건 없습니다. 그렇게 원하시면 그냥 최연우 회장이나 오상식 전무가 원하는 대로 ‘혁신적 시나리오’가 최고라고 받아 적으면 되죠. 간단하네요. 내일이면 프로젝트 끝내고 귀국할 수 있겠어요.”


“성 과장님.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이대로 후속 프로젝트까지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시겠죠. 김승일 대표도 퇴진한 마당에 이런 프로젝트는 IT조직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낼 테니까요. 그러니까—”


“성세윤 씨!”


한 차장은 쿵하고 울릴 정도로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시끌벅적했던 바에 순간 정적이 흐르며 우릴 향해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나도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순간 얼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흥분했었다. 침착해야 했는데, 실수였다. 우리에게 쏠렸던 시선이 원상 복귀되고 다시 웅성거림이 들릴 때쯤 한 차장이 억지로 짓누른 듯 어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훗, 저도 얘기 좀 하죠.”


“네에. 그러시죠.”


나도 모르게 너무 몰아붙였다는 민망한 마음에 입을 실룩이며 말했다. 한 차장은 생각을 정리하려는지 한참 동안 말없이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침묵에 익숙해질 때쯤 그는 충격적인 얘기를 꺼냈다.


“내년이면 세윤 씨나 저나 지금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네?”


“지금 어센트 글로벌에선 한국 시장 철수를 얘기하고 있어요. 한국 사무소를 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닫다니요?”


“예전부터 상황이 안 좋기는 했어요. 저희 시장 포지션이 너무 애매하거든요. 전략은 맥킨지, BCG처럼 전략만 하는 전문펌들이 있고 IT는 시스템 구축까지 턴키로 해줄 수 있는 IBM이나 오라클 같은 업체들이 있으니까요. 성장이 멈춘 건 오래전이었고, 수익도 계속 악화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일까지 터졌으니 최악이었죠.”


“김승일 대표 리베이트 사건 말인가요?”


한 차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하길 망설이듯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 나를 쳐다봤다.


“사실 제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습니다. 제가 어센트 글로벌 감사팀에 투서를 썼거든요.”


“한 차장님이요?”


김승일 대표를 몰아낸 게 한 차장이었다니! 말문이 막혔다. 리베이트 건이 터졌을 때 정 전무가 연루됐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품었지만 한 차장이 투서를 썼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렇다면 정말 이 모든 게 총괄대표 자리를 노리는 정 전무의 계획이었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걸 이리 쉽게 털어놓는 한 차장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충격에 휩싸인 채 한 차장과 대화를 이어간 나는 대화가 끝난 후에야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게 상황을 곡해하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글로벌 팀에 책을 잡히긴 했지만요. 사실 김승일 대표 팀에선 프로젝트 한번 하면 비용을 엄청나게 써댔어요. 영업활동이라고 하지만 본인들 술 마시는데 쓰는 거였죠. 심지어 가족여행 가는 것도 프로젝트 비용 처리를 하더군요.


리베이트도 그래요. 어센트 브랜드로 프로젝트 따고 국내 SI 업체에 외주 주면서 리베이트를 받은 거예요.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프로젝트도 무조건 외주를 줬죠. 그래야 단가를 낮추고 마진을 본인들이 챙길 수 있으니까요.


그런 관행 때문에 한국 사무소는 수익 개선도 성장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김승일 대표가 총괄대표가 되면 더 심해질 건 불 보듯 뻔했고요. 아마 그대로 뒀으면 어센트 감사팀이 아니라 검찰 쪽에서 먼저 찾아왔을 거예요. 그 길로 어센트 한국사무소는 공중분해되는 거고요.”


변명조로 급조한 얘기는 아니었다. 김승일 대표에 대한 소문은 예전부터 있었다. 휘하 임원들과 조직적으로 비리를 일삼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김승일 대표가 퇴임한 지금 누가 총괄대표가 되느냐였다.


“그래서 총괄대표가 공석이 돼버린 거였네요. 그럼 이제 누가 대표를 맡아야 할까요?”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한 차장을 쳐다봤다. 한 차장이 누굴 지목할지는 뻔했다. 한 차장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부정하진 않겠어요. 정 전무님이 그 자리를 원하고 계시긴 합니다. 그래서 후속 프로젝트가 중요한 거기도 하고요.”


“아, 그래서 이주완 대표님은 건너뛰고 이 프로젝트에 들어오신 건가요? 전략이 프로젝트를 망쳤으니 IT에서 도와주겠다는 명분으로요?”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프로젝트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건 이 대표님이시니까요.”


“네?”


“이 대표님이 직접 부탁하신 거예요. 전무님께 총괄대표 자리에 도전해 보라고 추천한 것도 이 대표님이시고요.”


“아니, 이 대표님이 왜…”


“모르셨군요. 이 대표님도 내년에 퇴임할 계획이세요. 그전에 정 전무님이 총괄대표로 자리 잡게 도와주는 게 어센트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시고요. 그래서 현대통신 어카운트도 뚫을 수 있게 계속 밀어주시는 겁니다.


물론 임정혁 이사님도 계시지만 임 이사님이 싸움닭은 아니시잖아요. 클라이언트와 어울려 술잔 부딪히고 프로젝트 따오는 건 정 전무님이 더 적격이에요. 지금 어센트에 필요한 사람은 훌륭한 책사나 꼼꼼한 관리자 아니라 거침없는 돌격대장입니다. 


우린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어요.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글로벌에서 한국 사무소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이미 투자는 줄이는 상황이고요. 세윤 씨도 잘 알 거 아닙니까, 가장 큰 피해자신데.”


“제가 피해자라뇨?”


“MBA 프로그램 말이에요. 작년부터 한국 사무소에 복지 혜택을 줄이고 있는 데 제일 처음 없어진 게 MBA 프

로그램이잖아요.”


“없어진 게 아니라 국내 프로그램으로 바뀐 걸로 알고 있는데요.”


게다가 한호진 당신이 그 첫 수혜자잖아! 다 알고 있는데 무슨 개수작이야.


“풋. 무슨 소리예요. 어센트 글로벌에서 한국 MBA를 왜 지원합니까? 그건 정 전무님이 프로젝트 비용으로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그런 복지라도 있어야 좋은 인력을 영입할 수 있다고 억지로 만드신 거예요. 대한통신과 온세통신 차세대 프로젝트 예산으로요. 둘 다 워낙 대규모 프로젝트 다 보니 프로젝트 인원들 복지차원에서 비용 사용을 재가받은 거예요. 


그리고 그 프로그램도 유예될 겁니다. 회사 사정도 안 좋은 데 그렇게 비용을 쓸 순 없죠. 설마 그것 때문에 세윤 씨 MBA 스폰서가 무산됐다고 오해했던 건 아니죠?”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아차 싶었다. 한 차장은 내 속을 훤히 꿰뚫는 듯 한 안광으로 날 지르봤다. 나는 그의 눈길을 피해 맥주잔이 올려진 테이블로, 그리고 바에 듬성듬성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가만 보면 세윤 씨는 정 전무님을 권력욕에 빠진 파시스트쯤으로 보는 것 같아요. 힘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재자라고 말이죠. 저는 그 옆에 기생하는 간신배 정도 되겠고요.”


한 차장이 뇌까렸다. 난 추국 당하는 역도처럼 가슴이 뜨끔 쑤시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파시스트라뇨. 아닙니다.”


“해명할 필요 없어요. 예전부터 그런 거 알고 있었으니까요. 전무님이나 저한테는 인사도 한번 제대로 안 했잖아요. 지난 3년 간 말이죠.”


“그건—"


“힘을 바랐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전무님은 10년 전 어센트에 처음 왔을 때부터 정말 쉴 새 없이 달리셨습니다. 한국 사무소에선 전무했던 IT 프랙티스를 만들어 냈고 글로벌과 결탁해 100명이 넘는 조직으로 키워냈으니까요. 


그걸 가능하게 한 게 바로 ‘힘’입니다. 수 백억짜리 프로젝트를 수주해 프로세스 설계부터 시스템 구축까지 완결할 수 있는 ‘힘’이요. 이번 프로젝트도 현대통신이라는 거대기업을 다룰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직접 나서신 거예요. 


그 힘이 있어야 저희 조직원들을, 아니 어센트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당장 100억이 넘는 3년짜리 프로젝트를 딴 다면 최소한 앞으로 3년 간 한국 사무소가 문 닫을 일은 없겠죠. 정 전무님은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희를 지켜주기 위해서 힘을 키우시는 거란 말입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센트 한국 사무소가 문을 닫을 위기에 쳐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김승일 대표와 이연희 대표가 한꺼번에 퇴진하며 사정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내가 MBA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내 미래를 걱정하는 동안 정 전무와 한 차장이 전혀 다른 차원의 전쟁을 벌이고 있을 줄이야! 난 세계대전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집에서 반찬투정이나 하고 있던 것이다.

이전 19화 45. 위성통신 사업전략 II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