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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28. 2023

48. 위성통신 사업전략 II (6)

다음 날, 마음을 추스르고 정 전무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한호진 차장 말대로 투자심의회에 가기 전 정 전무의 생각을 한 번은 들어봐야 했다.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정 전무가 스타벅스 커피 두 잔을 사들고 왔다.


“뜨아에 샷 추가?”


“네.”


정 전무가 내 커피 취향까지 알고 있었나?


“심의회 준비는 잘하셨죠? 어련히 잘하시겠지만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니 분석하신 내용은 철저히 숙지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프로젝트에 대해 처음 듣는 임원분들도 계시니까 초등학생한테 설명한다 생각하시고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시고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여쭤 볼 게 있습니다. 전무님은 왜 세 번째 시나리오가 답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그랬나요? 세 번째 시나리오가 답이라고요?”


정 전무는 입꼬리를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며 답했다.


“세 번째 시나리오에 대한 논리를 만들어보라고 하셨죠.”


“맞아요. 그랬어요. 하지만 그게 세 번째 시나리오가 답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제가 얘기드렸잖아요, ‘혁신적 전개’ 시나리오를 추가한다고 그게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라는 의미는 아니라고요. 


제가 세 번째 시나리오를 추가하고 분석을 요청한 건 세윤 씨 의견이 바이어스 되어 있는 것 같아서였어요. 그간 분석했던 리서치 자료들과 시장 데이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잭이 제시한 시나리오는 애초부터 배제하고 분석도 안 했던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시장 데이터는 충분히—”


“시장 데이터 말고, 잭이 제시한 시나리오에 대한 분석이요. 그가 자신이 주장한 속도로 4G 시장을 키운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업이 전개될지는 분석하지 않았죠. 시장 데이터만 보고 4G 시장이 그렇게 빨리 클 수 없다고 판단해서 추가 분석은 고려도 안 하셨던 거예요. 전 그걸 바이어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잭의 오만한 태도나 분석에 대한 세윤 씨 스스로의 자만감 때문에 그렇게 판단한 건 아닐까요? 그런 게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니까요. 세윤 씨가 찾았다고 생각했던 ‘답’이 꼭 로직과 팩트에 근거해서만 도달한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얘기드리는 겁니다. 실제 우리 인간이 그런 존재니까요. 


어찌 됐건 맥킨지나 모건스탠리가 그 시나리오를 들여다봤다면 저희도 최소한 추가 분석을 해봐야지 그 시나리오가 어떻게 하면 가능한 건지 얘기나 할 수 있죠. 그들이 이런저런 조건 하에서 세 번째 시나리오가 가능하다고 얘기할 때 저희만 시장 데이터를 보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라며 쳐내버릴 순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세윤 씨에게 추가 분석을 요청했던 거예요.”


“그럼 상무님이 생각하시는 답은 뭐죠?”


“하하. 너무 어렵네요. 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답을 피하는 건가?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끝까지 물어봐야 했다.


“실은 어제 한 차장에게 회사 상황에 대한 얘길 들었습니다. 지금 회사 상황이 안 좋다는 것과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 지도요.”


“훗. 그래서 한 차장이 그러던가요. 세 번째 시나리오를 답으로 제시해 달라고요? 한 차장은 좀 우직한 면이 있어서 그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했을 수도 있겠네요. 저희로선 이 프로젝트를 잘 마치고 후속 프로젝트까지 따내야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전 이 문제에서 만큼은 저희가 답을 제시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제시할 수 없어요. 이 문제는 정답과 오답의 문제 아니라 의사결정의 문제거든요. 


대대적으로 자금을 투입해 B2B 기업고객 확보를 위한 영업팀을 만들고, 위성통신과 이동통신 모두 호환되는 스마트폰을 개발해 마케팅 비용을 태울 거면 세 번째 시나리오로 추진하는 거고, 그게 아니면 첫 번째나 두 번째 시나리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위험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투자할 의지가 있다면 세 번째 시나리오로 갈 수 있는 거죠. 


그 의사결정을 할 사람은 저도 아니고 세윤 씨도 아닙니다. 바로 현대통신 최연우 회장입니다. 그래서 회장의 뜻과 의지가 중요하다고 얘기했던 거고요. 


솔직히 세윤 씨 분석이 맞긴 해요. 이 사업이 세 번째 시나리오대로 전개되려면 엄청난 노력과 행운이 필요할 겁니다. 최 회장이라고 그걸 모를까요? 통신업계 수십 년간 발 담았던 회장 참모들이 그걸 모를까요? 아마 지금 제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이 최연우 회장일 겁니다. 회장이라고 투자를 마음대로 집행하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거든요.


여느 총수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뒤로 빠지고 책임을 저희나 다른 임원들에게 넘기려 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뵈오니 최 회장님은 아닙니다. 그분은 이 건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실 거예요. 그래서 세 시나리오 모두 A부터 Z까지 분석해 알려주는 게 중요해요. 최연우 회장이 진정 원하는 방향대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제가 세 번째 시나리오에 대해 철저히 분석해 달라 요청드린 건 최 회장에게 세 번째 시나리오로 가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그제야 깨달았다. 정 전무는 내 분석을 왜곡하려 한 것도, 답을 피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철저히 조언자 입장에서 최연우 회장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가 CEO (Chief Executive Offier), 즉 최고 의사결정권 자니 말이다.


내가 최연우 회장이라면 이런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40대 초반의 젊은 총수. 능구렁이 같은 간신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으려 투쟁하는 그였다. 그만의 성과를 내기 위해선 도약이 필요했다. 신기술이나 미국 시장 진출처럼 대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업적 말이다. 


투자가 실패한다면 그걸 빌미로 주주총회를 열고 어떻게든 회장이 지닌 권력을 가져오려는 적대적 세력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투자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도전하려 했다. 선대가 이뤄놓은 업적을 부지불식간 물려받은 어부지리 총수가 아니라 물려받은 유산을 발판 삼아 새로운 도약을 이루는 존경받는 경영가가 되기 위해 도전하려는 것이었다.


난 그런 최 회장에게 논리와 팩트를 들이대며 세 번째 시나리오는, 그의 꿈은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라 폄하하려 했다. 리서치 리포트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말이다. 이 얼마나 치기 어린 생각이었던가? 난 오만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자신이 빌런이란 것도 눈치채지 못한 분탕꾼에 불과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 전무는 침울해 있는 날 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켜줬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날 향해 미소를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제 얘길 해드릴까요? 한 차장이 이미 말했다고 하니 터놓고 얘기드릴게요. 사실 총괄 대표님 퇴임하시고 김승일 대표와 이연희 대표까지 나가면서 한국 사무소 재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습니다. 진행 중이던 대형 프로젝트가 세 개나 엎어졌거든요. 이대로 가면 어센트 코리아는 파산입니다. 사무소 문을 닫아야 해요.


전 그게 어센트 입장에선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합니다. 어센트 한국이 아니라 글로벌 관점에서요. 한국은 정보통신 기술의 선두를 달리고 있어요. 통신뿐만 아니라 전자 분야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죠. 어센트 글로벌이 이런 시장에서 철수하는 건 너무 큰 손해입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가 그걸 방증하죠. 저희 통신사는 그간 해외 사업자들 베끼기 급급했어요. 한데 이제 우리 사업자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미국 통신시장에 투자를 하는 겁니다. 한국에 국한된 로컬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거죠. 성공여부를 떠나서 그 자체에 상징적 의미가 있어요. 그동안 갇혀있던 틀을 깨고 나와 세계시장과 소통하고 혁신하려는 거니까요.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된다면 후속으로 ‘차세대 ICT 플랫폼 구축’까지 수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정도면 분명 저희도 글로벌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진도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럼 더더욱 세 번째 시나리오를 밀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말했듯이 저희 입장에서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세 시나리오 중 어느 시나리오가 답이라고 제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역할은 최연우 회장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이에요.


최연우 회장은 어떻게든 계속 신사업과 미국 시장 진출을 추진할 겁니다. 인정받기 위해 본인 만의 업적을 만들려 할 거예요. 우린 그가 자신만의 업적을 이루는 데 있어 신뢰할 만한 파트너라는 걸 보여줘야 해요. 


그의 참모진보다 인사이트 있고, 맥킨지보다 현실적인 조언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죠. 그러면 그는 우리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겁니다. 최연우 회장의 신뢰를 얻는 것, 그게 이 프로젝트의 성공입니다.”


정 전무가 들려준 모든 얘기를 소화하기 까진 꽤 시간이 걸렸다. 어제 한 차장에게 들은 얘기조차 어떻게 받아들일지 혼란스럽던 상황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점차 내 의식은 현실을 따라잡았다. 


그리곤 현기증이 나고 속이 뒤틀어지며 구토가 밀려왔다. 이제 세 시간 뒤 투자심의회에 참석해 최연우 회장의 신뢰를 얻어야 할 당사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고, 결과에 따라 어센트 한국 사무소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부담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 세치 혀에 천 억원이 넘는 돈의 행방이 결정될 수 있었고, 어센트 직원 수 백명의 커리어가 뒤바뀔 수 있었다. 


투자 자체에 대한 의사결정은 최 회장의 몫이었지만 그에게 분석결과를 어떻게 말하느냐는 온전히 내 결정이었다. 그 결정의 중압감이 묵직이 내 영혼 위로 드리웠다.


“후—"


나도 모르게 장탄식이 새어 나왔다. 정 전무는 턱을 한번 쓸어내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큰 짐을 지어드리는 건가요? 두려운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에 들어올지 많이 망설였어요. 임정혁 이사와 김한겸 부장도 그렇게 곤란을 겪은 셈인데, 전략 전문가도 아닌 제가 과연 이 프로젝트를 맡는 게 맞는 결정인지 판단할 수 없었죠. 


게다가 이 프로젝트 하나에 저만 바라보는 우리 IT 식구들 100명의 미래가, 그리고 어센트 사무소 200명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하니 더욱 부담이더군요. 전문가도 아닌 제가 들어오는 게 맞을지 고민했죠.”


“그런데 왜 직접 들어오신 거죠?


“이주완 대표님 때문이죠. 대표님은 제 은사님 같은 분이십니다. 제가 입사한 후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찾아

뵜었죠. IT부서도 제가 이끌고는 있지만 사실 이 대표님이 키워주신 거나 다름없어요.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조언을 적절히 해주셨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엔 웬일로 대표님이 절 먼저 찾으셨죠. 아주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한번 해결해 보라 그러시더군요. 그러면서 말씀하셨죠. 이 정도 문제를 혼자 해결한다면 IT 뿐만 아니라 어센트 한국 사무소 대표 자격을 갖춘 거라고요.”


이주완 대표 다웠다. 나에게 덜컥 시큐테크 사 프로젝트를 맡기며 리딩해보라 하던 그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제가 이번 프로젝트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데엔 더 큰 이유가 있었죠.”


“어떤 이유요?”


“믿었어요, 세윤 씨를. 분석 결과야 임 이사님과 김 부장님이 충분히 검토해 놓으셨을 테고 디테일은 세윤 씨

가 아니까 제가 클라이언트 커뮤니케이션만 잘 관리하면 승산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죠. 그래서 제가 도전할 수 있었던 겁니다.


세윤 씨는 이미 충분히 이 사업에 대해 고민하셨고 그 어떤 전문가들보다 깊게 들여다보셨습니다. 딱 한 가지 걸렸던 게 세 번째 시나리오에 대한 편견이었는데 그건 이미 극복하신 것 같고요. 


그러니 세윤 씨는 소신껏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만 얘기하시면 돼요. 세윤 씨가, 아니 어센트가 현대통신 미국 진출 사업을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최연우 회장에게 당당히 알려주세요.”


정 전무는 말을 마치며 부드럽게 웃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나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더 해야 했다.


“전무님… 예전에 제 입사는 왜 도와주셨나요? 전 이렇다 할 스펙이 있던 것도 아니고 인턴 경력 하나 제대로 없었는데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정 전무는 눈을 대각선으로 치켜뜨며 입을 내밀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제 생각이 났죠. 아무것도 없으면서 뭐가 없는지도 모르고 자신감만 넘쳤던 때가요.


그거 아세요? 발 뒤꿈치에 붙은 세포를 뇌에 가져다 놓으면 뇌세포로 기능을 하게 된다는 거요. 우린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세윤 씨는 분명 아웃사이더였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감이 왔었어요. 세윤 씨라면 어센트에 들어와서 어센트에 맞게 진화할 거라고 말이죠. 뭐, 세윤 씨야 절 버리고 가버리셨지만요.”


“그땐 죄송했습니다.”


“아,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전 오히려 뿌듯했답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걸 당당히 밝히고 추구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그게 제가 만들고 싶은 어센트이기도 하고요. 어느 위치에 있는 그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걸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화할 수 있는 그런 회사요. 


세포는 매 순간 진화한답니다. 피부세포는 몇 주마다 완전히 교체되고 세윤 씨 몸을 이루는 모든 원자는 단 7년만 지나면 다른 원자로 교체돼요. 7년 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거죠. 


그러니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본성이자 조건이니까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그런 도전의 일환인 거죠.


전 이제 정말 일어나 봐야겠어요. 본사와 콜이 있거든요. 세윤 씨도 슬슬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나는 털털한 모습으로 일어나는 정 전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이토록 커 보인 적은 없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이다. 


이 이야기의 최종 빌런은 나였다. 그것도 타노스나 사우론 같은 막강한 빌런이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처럼 거대한 대마법사의 가면 뒤에 숨은 치졸한 빌런 말이다. 정주성이란 영웅을 방해하던 빌런이 바로 성세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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