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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27. 2023

47. 위성통신 사업전략 II (5)

“정 전무님 참 재미있으신 분이세요. 정 전무님은 개발자 출신이세요. 


원래 SI 업체 다니시다가 어센트로 이직하셨죠. 중소기업이었는데 하도급 일을 많이 했나 봐요. 왜 우리나라 산업구조가 그렇잖아요.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일반화 돼서 실제로 개발 역량을 보유한 중소 개발사들은 최저임금에 근로자 처우도 열악할 수밖에 없죠. 


처음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어센트와 한번 일하고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드셨대요. 같은 일을 하면서도 본인은 대기업 하청이나 받으며 머슴처럼 착취당하는데 컨설턴트들은 전문가로서 대접받으면서 일하니까요. 그때 이런 불공정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게 생기셨다죠. 역량을 갖춘 개발자들이 제대로 대접받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 스스로 그런 회사를 만들 수는 없다고 판단하셨어요. 어떤 회사를 만들어도 한국 산업구조에선 대기업 하청 업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때 정상무 님이 생각하신 게 어센트에서 IT 부서를 키우는 거였어요. ‘어센트’라는 브랜드만 있다면 개발자들이 역량에 걸맞은 처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하신 거죠. ‘어센트’는 외국계 회사라 대기업 정치나 지배구조에 영향받지 않고 본인 재량껏 사업을 키울 수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 거예요. 어센트 IT 부서를 본인 비즈니스로 생각하고 키우시는 거죠. 본인 역할은 프로젝트를 하나라도 더 띄워 한 명이라도 더 고용하는 거라고 믿고 계세요. 개발자들이 이런 회사에서 더 많이 일을 해봐야 본인의 가치를 알고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면서 일할 수 있다고요. 어때요? 조금 이상적인 면이 있으시죠?”


쳇,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사려 깊다고 칭송이라도 하란 말인가? 어찌 됐건 그는 내 입사를 지연시켰고 나를 IT의 늪에 빠뜨리려 했던 장본인이다. 그가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던지 그는 나의 주적, 최악의 빌런이었다. 


그가 나와 어센트 임직원들을 위해 이 프로젝트에 들어왔고 이 험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별로 와닿지 않는 얘기였다. 아무리 우리 핑계를 대도 결국 본인 커리어를 위해 그러는 것 아닌가? 


한 차장은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내 표정을 보며 답답한 듯 말했다.


“세윤 씨 본인하곤 아무 상관없는 얘기 같죠? 그렇지 않아요. 덕분에 세윤 씨가 지금 여기 있는 거니까요.”


“네?”


“프로젝트 비용으로 인턴을 채용해 입사까지 시켜주는 건 정 전무님이 처음 도입하신 방법이에요. 어센트에선 원래 인턴 채용도 공채로 진행했는데 그러면 틀에 박힌 인재 밖에 뽑을 수 없다고 하셨죠.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인재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창안한 방법입니다. 세윤 씨도 경험은 없지만 경험도 기회를 줘야 쌓이는 거라면서 정 전무님이 극구 고용하신 거예요.”


그랬었나? 그래도 비겁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다니 말이다. 어찌 됐던 정 전무 때문에 내 정사원 전환은 늦어졌는데 말이다. 내가 그에게 빚진 건 없었다.


“그런 면에선 이주완 대표님과 정반대 스타일인 거죠. 이주완 대표님이나 전략 쪽은 좀 엘리트주의가 있잖아요. 세윤 씨가 전략에 지원했다면 서류 심사도 통과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예전 전략에 있던 윤치수 과장 추천으로 입사했다고 했었죠? 윤 과장이 다 생각하고 전략이 아니라 정 전무한테 세윤 씨 이력서를 줬을 거예요. 정 전무 성향을 아니까요. 


사실 저희 IT 사람들은 전략 사람들처럼 명민하진 못해요. 저희는 정말 프로그래밍 언어처럼 인간관계도 성립된답니다.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거지 중간은 없어요. 모호하지 않고 같은 인풋과 로직이면 아웃풋도 항상 같게 나오죠. 그때그때 상황이나 사람에 맞춰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건 체질적으로 안 맞거든요.


아, 뭐, 그런 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비꼬아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저흰 정말 그렇게 못해서, 부러워서 그러는 거예요. 때론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니까요. 저도 세윤 씨 보면 어떤 땐 부럽기도 하고 배워야 할 점도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소리지? 치수라면 모를까, 내가 계산적이라니? 한 차장은 눈썹 사이가 좁아지며 눈살을 찌푸리는 내 얼굴을 보며 설명을 더했다. 다 아는데 뭘 모르는 척하느냐는 듯 말이다.


“왜, 세윤 씨가 대한통신 프로젝트에 안 들어가겠다고 이메일 썼을 때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야 당돌한 신입이 들어왔다고 웃어넘겼지만 사실 그때 정 전무님은 좀 난처해졌었어요. 지금 와서 얘기지만 그땐 정말 저도 배신당한 기분이었으니까요.”


배신? 하긴 한호진 차장은 내막을 모르니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IT로 데려가겠다며 내 발목을 잡고 있던 건 정주성 전무였는데 말이다. 오해는 바로 잡아야 했다.


“한 차장님, 그때 그건 —”


“솔직히 얘기하면 세윤 씨 정직원 전환은 불합격이었어요. 서류 심사 때도 워낙 인사과에서 얘기가 많았는데 2차 인터뷰 평가도 안 좋았죠.”


“네?”


생각해 보니 두 번째 인터뷰 때 답을 못한 질문이 많긴 했다. 그래도 망쳤다고 까진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합격한 거지?


“세윤 씨는 전무님이 억지로 합격시킨 거예요. 대한통신 프로젝트에 꼭 필요하다고 우겨서 겨우 인사과 동의를 얻어냈죠. 이메일만 수십 통은 쓰셨을 겁니다. 저랑 같이 있을 때 통화하는 것도 몇 번 들었고요. 성세윤이 없으면 프로젝트 못한다고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시면서 말이죠.”


“아—”


“근데 입사가 결정되니 세윤 씨는 바로 다른 프로젝트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셨죠. 전무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졌겠어요. 애초에 뽑자고 했던 이유가 무색해진 셈이니까요.”


나를… 입사시킨 게 정주성 전무라고? 입사를 지연시킨 게 아니라? 한 차장은 점점 확장되는 내 동공을 보며 정말 몰랐냐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세윤 씨는 몰랐군요. 세윤 씨 이력서에서 나올 수 있는 스토리는 하나밖에 없었어요. 


물리와 수학을 전공했지만 석사 논문을 준비하며 IT에 관심이 생겼다. 제 기억으론 석사 논문을 데이터베이스 관련해서 쓰셨던 거 맞죠? 그래서 대한통신 프로젝트에 지원하게 됐다. 정주성 전무 밑에서 IT 전문가로 커리어를 키워가고 싶다.


그게 세윤 씨 입사를 가능하게 한 스토리였어요. 때마침 인사과에서 IT 인력을 늘리려고 했으니까 전무님은 그걸 감안해 세윤 씨를 IT 전문가로 팔았던 거죠. 


그렇게 뽑아 놨는데 인사과에서도 황당했을 거예요. 뽑자마자 세윤 씨는 IT로는 커리어를 키울 생각이 전혀 없다고 공공연히 선포해 버렸으니까요.”


거대한 북채로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듯 띵하게 머리가 울렸다. 몰랐다. 내 입사가 가능했던 게 온전히 정 전무 때문이었다니 말이다. 정 전무가 무슨 이유로 나를 그렇게 챙긴단 말인가? 정 전무는 분명 독단적이고 자신 밖에 모르는 빌런인데 일면식도 없던 날, 왜?


“하지만 멋진 반전이긴 했어요. 세윤 씨도 세윤 씨 입장이 있으셨겠죠. 그렇게 당당하게 이메일 쓴 패기는 정말 부러워요. 뭐랄까, 현실 감각이랄까? 단순히 이기적이라 하기엔 좀 그렇고, 생존을 위한 투쟁심 같은 거겠죠.


사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면도 있어야 해요. 그런 게 없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죠. 뭐, 덕분에 저는 혼자 몇 일밤을 새야 했지만요. 그런 것까지 세윤 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겠죠. 정 전무님도 그때 이후로 조금 달라지시긴 했어요. 정 전무님이 직접 인턴 인터뷰를 본 건 세윤 씨가 마지막이었거든요.”


잠깐. 한 차장은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내가 지금 의도적으로 정 전무와 본인을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입사를 위해 소위 말하는 ‘먹튀’를 했다고 말하는 건가?


어처구니없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 한 구석에서 내가 정말 그런 인간일까 하는 의심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최소한 실재 내가 했던 행동과 결과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어디 빌런이 스스로 빌런이라고 인정하던가? 모두 나름의 이유와 동기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뱀처럼 음험한 속내가 헙수룩한 머리칼을 타고 쪼뼛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알고 있다 생각한 자아는 무정형의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한 차장은 여전히 스스로 빌런임을 수긍 못하는 나에게 메두사를 대적하는 페르세우스 마냥 거울방패를 내밀었다.


“세윤 씨, 정 전무님께 고맙다고 얘기한 적은 있나요?”


차디찬 검신이 목을 긋고 심장을 꿰뚫었다.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스펙도 없이 수렁에 빠져있던 나를 구해준 정 전무였는데, 난 그의 등에 당당히 칼을 꽂고도 그를 배신자라 힐난했다. 이기적이고 독단적이고 근거 없이 자만심 높고 자신만 생각하는 악한. 그 모든 면면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불과했다.


그랬다. 내가 정 전무를 배신한 거였다. 정 전무야 말로 아무것도 아닌 나를 수렁에서 건져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와 혜택을 주기 위해, 어센트를 보호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는 히어로였다!


한호진 차장은 내 어깨를 몇 번 다독거린 후 밤이 늦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망연자실한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등에도 내가 꽂은 칼이 박혀있었다. 


대한통신 프로젝트를 하며 그렇게 함께 고생을 했었는데도 그가 도와달라며 전화했을 때 난 냉정히 거절했다. 인력이 부족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를 외면했다. 


백지상태였던 나에게 회의록 작성부터 문서작업까지 모든 걸 가르쳐 줬던 그였는데, 내 입사를 위해 정 전무에게 늘 내 칭찬만 늘어놨던 그였는데  말이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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