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올라 다시 길을 나섰다. 행선지는 스카프타펠과 스비나펠스요쿨. 둘 다 빙하라 둘 중 하나만 가봐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구글맵에서 본 빙하 사진은 스비나펠스요쿨이 더 멋있었고, 반면 스카프타펠은 스바르티포스라고 주상절리로 둘러싸인 폭포가 있어 가보고 싶었다. 결론은 두 군데 모두 가자!
중요한 건 일몰을 어디서 볼거냐 였는데 아직 시간이 있어 모두 둘러본 후 결정해도 될 것 같았다. 우선 스카프타펠에 있는 스바르티포스에 가보고 다음에 스비나펠스요쿨까지 본 후 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중요한 건 일몰을 어디서 볼 거냐였는데, 아직 시간이 있어 모두 둘러본 후 결정해도 될 것 같았다. 우선 스카프타펠에 있는 스바르티포스를 가보고, 그다음 스비나펠스요쿨까지 본 뒤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둘 다 일몰 풍경이 별로일 것 같다면 글라우프 협곡으로 돌아가 일몰을 보고 비크로 가면 됐고, 아니면 스카프타펠이나 스비나펠스요쿨에서 일몰을 본 뒤 비크로 돌아가 다음 날 아침 글라우프 협곡에서 일출을 보면 됐다. 그날 오후와 다음 날 아침까지 날씨는 모두 맑았다. 예보가 맞으리라 장담할 순 없었지만 아이슬란드에 온 후로 맑음이 가장 오래 지속되는 날이었다.
차를 달리다 보니 멀리 커다란 빙하가 눈에 들어왔다. 스카프타펠과 스비나펠스요쿨이 속한 유럽 최대의 빙하지대 바트나요쿨이었다. 전체 면적은 충청남도보다 크다고 하니 얼마나 큰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헌데 묘하게 왼편에 있는 바위산에도 관심이 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우뚝 선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산 근처에 빙하강과 웅덩이가 있어 반영과 함께 멋진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차 하는 순간 산을 지나쳐버렸고 차를 돌려야 하나 생각하는데, 마침 전망대 표지판과 주차하고 있는 차량들이 보였다. 비크 교회에 이어, 또다시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을 보게 됐다.
바위산은 웅크린 거인처럼, 거대하고 묵직하게 솟아 올라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가, 물웅덩이에 비친 반영과 바위산을 함께 담으니 역시나 멋진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게 700m 높이의 로마그누푸르 산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때 절대 알 수 없던 건 그 산이 나에게 얼마나 극적인 풍경을 선사할지였다.
스카프타펠은 로마그누푸르 전망대에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주차장이 꽤나 크게 조성되어 있는 걸 봐서는 스비나펠스요쿨보다 스카프타펠이 주요 빙하지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전 구글맵을 켜고 주변을 살폈다. 원래 목적지였던 스바르티포스까지는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2.3km, 등산로를 따라가면 40분 정도 거리였다. 헌데 오른쪽으로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지도에는 스요나르니파 전망대로 나오는데 주차장에서 3.3km 떨어져 있었다. 빙하지대 옆 자드락길을 따라 꽤 높은 고도까지 올라야 해서, 빙하지대가 한눈에 보일 것 같았다.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고, 전망대에 갔다가 스바르티포스까지 둘러보고 내려오면 될 것 같았다. 3.3km에 고도 250m, 난이도는 인왕산 정도로 그리 어렵진 않았다.
초반엔 꽉 막힌 전망이었고, 사실 기대도 크지 않았다. 구글맵 리뷰는 단 세 건뿐이었고, 올라온 사진들도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전망대에 도착할 때까지는 선선한 바람과 맑은 공기를 즐기며 가볍게 운동한다는 마음뿐이었다.
헌데 숨이 가팔라질 정도로 고도를 높이자 스카프타펠 빙하지대와 멀리 스비나펠스요쿨까지 시야가 탁 트였다. 전망대에 올라선 순간, 덜컥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스카프타펠 빙하의 광활한 설면이 구불구불 대지를 타고 내려왔고, 그 끝은 황갈색 평원과 맞닿아 있었다. 뒤로는 만년설이 꼭대기만 살짝 덮은 봉우리들이 일렬로 솟아 있었고, 하늘은 뿌연 안개와 얇은 햇살이 섞여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얼음 위로 은빛 광채가 일렁였다.
그때 전망대 아래로 봉긋 솟아오른 바위 하나가 보였다. 가방을 집어던지고 샛길을 따라 내려가 봤다. 바위에 올라서니 빙하지대와 그 뒤로 솟은 산등성이, 그리고 해가 떨어지는 각도가 모두 맞아 떨어졌다. 일몰 때쯤이면 환상적인 전망이 완성될 것 같았다. 글라우프 협곡에 되돌아가거나 스비나펠스요쿨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일순 말소됐다. 여기가 최적의 일몰 뷰포인트였다.
잠시 숨을 돌리고 시계를 봤다. 아직 일몰까지는 세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전망대에서 원래 목적지였던 스바르티포스까지는 능선을 따라 2.5km. 왕복 5km지만 능선길이라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주섬주섬 가방을 짊어메고 일어섰다.
능선길은 평탄해 걷기 편했다. 무난한 길을 따라 걷자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차장에서 스바르티포스를 먼저 갔다가 전망대로 올 걸. 지금은 날씨가 좋은데 일몰 무렵 구름이 덮치면 어쩌지?
욕심이라는 게 무서웠다. 전망대에 오를 때만 해도 시간 떼우기 산책으로만 생각했다. 전망대에서 빙하 모습만 내려다봐도 충분할 것 같았는데, 점점 모든 게 완벽하길 바라고 있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거나 적당히 빛이 산란될 정도의 구름이 있고, 산등성이에 쌓인 눈은 붉게 타오르며, 황금빛 일몰은 빙하를 뒤덮을 정도로 광대하게 내리쬐길 바랐다. 아, 그리고 사람 또한 한 명도 없어야 했다. 오직 나 혼자만이 천혜의 비경을 독점해야 했다. 본다고 닳아 없어질 풍경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욕심이 나는 걸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방으로 트인 전경을 즐겼다. 멀리서부터 은은히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나침반처럼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계곡 아래로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고 멀리 검은 기둥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게 세워진 육각기둥들은 장송곡을 연주하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같았다. 그림자가 반 이상을 덮어버린 탓에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30분가량의 하이킹을 보상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폭포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다시 전망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늘은 점점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지평선 끝자락에 구름이 길게 늘어져 있긴 했지만, 조금 지나면 구름을 뚫고 강렬한 빛을 선사할 참이었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은 기분 좋게 쿵쾅댔다.
과연 아이슬란드는 내 기대에 보답해줄까, 아니면 다시 또 변덕을 부리며 애를 태울까?
전망대에 도착한 건 일몰 45분 전이었다. 해는 산봉우리 뒤를 따라 넘어가고 있었고, 풍경은 점점 노란 빛을 띠며 불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는 잠시 구름 밑으로 숨었다가 구름을 뚫고 내려왔다.
능선을 뛰어다니며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빙하와 주홍빛으로 물든 산등성이, 그리고 그 빛을 받은 나 자신을 사진에 담아봤다.
능선을 넘어 걸어오는 한 커플의 모습은 피어오르는 구름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망대에 있던 사람들은 어두워지기 전 내려가려는 듯 하나둘 사라졌다. 전망대에는 간간이 부는 바람소리만 남았고, 세상엔 나 혼자였다. 전망대 아래 바위 위에 서서 빙하와 산봉우리가 빛으로 채색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넋을 잃게 된다. 빙하 맞은편 산봉우리는 일몰의 절정을 암시하듯 주홍빛으로 타올랐다. 가슴은 뭉클해졌고, 감탄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지금 내 눈앞에 이런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저물고, 검은 어스름이 시야를 덮을 때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스프레드시트를 가득 채운 숫자들과 보고서에 빽빽히 들어선 문자로 가득했던 내 시선에, 이런 풍경이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절경을 눈에 담아보지 않고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무작정 나 홀로 여행을 떠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6개월 전, 환불 불가 조건으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출발 전까지 정말 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지만, 어찌 보면 모두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최악의 선택은 ‘inaction’—무위—뿐이다. 첫 발걸음의 두려움과 첫 경험의 생경함을 넘어서면, 생생한 감동이 기다린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그 한 발짝을 내딛는 것이다.
이동경로
로마그누푸르: Lómagnúpur Scenic Spot
스카프타펠: Skaftafell Parking
로마그누푸르 뷰포인트
주차장은 링로드에 붙어 있어 바로 빠지면 된다. 반영을 담으려면 주차장 아래 있는 웅덩이 앞으로 가야하는데 주차장에서 걸어가도 되고 길가에 주차를 하고 가도 된다. 다만 길가에 주차를 하려면 경사가 있어 조심해야 한다.
스카프타펠 뷰포인트
스요나르니파 전망대는 주차장에서 3.3km 떨어져 있어 50분 가량 경사로를 올라야 한다. 가벼운 하이킹 보다는 등산에 가깝다. 전망대에서 빙하 쪽을 보면 희미하게 길이 보이고 아래 절벽까지 내려갈 수 있다.
전망대에서 스바르티포스까지 가려면 2.5km 정도 능선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40분 정도 걸린다.
주차장에서 스바르티포스나 전망대로 올라가 반대편으로 내려오면 총 8km로 2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