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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 Sep 28. 2019

<라이프 오브 파이>

인간이 종교를 믿는 이유

어린 피신 몰리토 파텔은 힌두의 신 크리슈나의 입 속에 있는 우주를 상상하며 그 숭고함에 매료된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게 한 것이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다고 말하면서도, 신약성서를 거듭 접하며 불현듯 예수를 좋아하게 된다. 이렇듯 상식을 초월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소년의 마음 속에 경이로움을 심어내었다. 신을 경애하는 피신은 어느 날 친구들에게 자신을 '파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한다. 그 날, 피신은 불가분 소수인 파이를 설명하기 위해 파이를 칠판에 몇백짜리까지 써내려가는 요행을 선보인다. 원주율은 인간이 정확히 써낼 수 없는 무한 소수이며, 순환소수가 아니기에 규칙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숫자이다. 피신이 파이를 자처하며 원주율을 몇백자리까지 써내려가는 이 시퀀스에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피신의 동경이 반영되어 있다.
  
-이야기의 가치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파이는 이야기 거리를 물색하러 찾아온 캐나다 작가에게 자신의 표류기를 이야기해준다. 그런데 파이가 털어놓는 표류기는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그 포류기에서 파이는 호랑이와 함께 배에 타 물에 투영된 우주를 목도하고, 형광 나무가 가득한 식인섬에서 하루를 보낸다. 파이의 이야기는 환상적이다 못해 황당하다.
 
기이한 이야기를 마친 파이는 작가에게 또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이가 육지에 무사히 도착하자, 파이가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한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그에게 찾아온다. 파이는 일본인에게 호랑이가 나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그 이야기를 쉽게 믿지 못한다. 그러자 파이는 일본인에게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호랑이가 등장하지 않는 그 이야기에선 파이의 어머니는 살해당하며, 파이는 살인범의 인육을 먹으며 망망대해에서 살아남는다.
 
캐나다 작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파이는 그에게 "무슨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듭니까?"라고 묻는다. 작가는 호랑이가 나오는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더 좋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다에 표류하여 인육을 먹으며 살아남은 간결한 이야기보다 호랑이가 나오는 장엄한 이야기를 선호할 것이 분명하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현실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품은 미적 가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전한 파이는 작가에게 본인의 포류기를 정리한 보고서를 건내주고 자리를 뜬다. 작가는 일본인들이 파이에 관해 쓴 보고서를 펼쳐본다. 보고서엔 파이가 뱅골 호랑이와 함께 표류해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일본인들은 파이에게 호랑이가 나오지 않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지만, 결국 그들 역시 호랑이가 나오는 이야기를 선호했던 것이다.
 
-인간이 종교를 믿는 이유-
  
파이는 캐나다 작가에게 자신의 장중한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신을 믿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무신론자인 작가로 하여금 신을 믿게 해준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파이의 이야기가 어떤 신화적 특색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흥미로운 부감 숏이 많이 있다. 바다에 투영된 하늘을 조명하는 숏,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 하늘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보이는 부감 숏, 해파리들의 색체가 수놓인 우주 같은 바다를 비치는 숏. 이러한 숏은 대체로 물의 무한성을 강조함으로써 관객들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신비로운 부감숏을 연신 비친 후에는 파이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식인섬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에서 파이는 그 이색적인 장소를 신의 선물이라고 여기며 다시 한 번 생존할 의지를 다진다. 그는 자신이 표류 중 맞닥뜨린 물체의 저변에 신의 뜻이 서려있다고 설파한다. 이처럼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세상의 표면 너머에 세계의 궁극적인 근거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종교의 서사는 인간을 매료하는 미적 숭고함을 품고 있다.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사랑과 책임감. 신화는 때로는 우리에게 환상적인 일화를 전하고, 때로는 초월적 존재가 우리를 지지한다는 믿음을 주며 인생을 지탱해준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며 우리에게 영감을 주곤 하는 신화는, 말하자면 크리슈나의 일화처럼 입 안에 우주를 품은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화가 이러한 특징을 가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형이상학적 가치를 신비로운 필치로 탐구하는 파이의 이야기에서 신화적 특색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파이의 이야기는 현실적이지는 않을지언정,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은 숭고함을 품고 있다. (파이가 신약성서를 접했을 때 그 일화가 비합리적이라고 여기면서도 내적으로 호감을 느낀 것은 캐나다 작가가 파이의 기이한 이야기에 호감을 느낀 것과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파이의 이야기가 '신을 믿게 해주는 이야기'인 것은 파이의 이야기가 전하는 요지를 종교에도 접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종교에 관해 따져야 할 요소는 종교의 현실성이 아니라 종교가 지닌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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