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속의 전통, 전통 속의 혁신
런던의 번화한 리젠트 스트리트(Regent Street)를 걷다가 문득 옆길로 한 걸음만 옮기면,
세상과 조금 다른 리듬이 흐르는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짙은 목재의 튜더 스타일 건물,
고풍스러운 창문 너머로 퍼지는 보랏빛 조명,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텍스타일과 향, 공예와 문화.
바로 1875년에 문을 연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 중 하나,
리버티(Liberty) 백화점이다.
1875년, 아서 라센비 리버티(Arthur Lasenby Liberty)는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에 작은 상점을 열었다.
그는 일본과 동양의 직물, 공예품을 수입해 영국 상류층과 예술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위트 있는 언변과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대를 앞서간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예술적 쇼핑객의 선택"
이라 평했다. 리버티는 그 자체로 예술이자, 새로운 감각의 공간이었다.
1890년대에는 유럽 전역에 아르누보(Art Nouveau) 스타일을 확산시키며
이탈리아에서는 이 스타일을 아예 ‘Stile Liberty(리버티 스타일)’이라 부르기도 했다.
현재의 리버티 건물은 1924년 그레이트 말버러 스트리트에 세워진 목조 튜더 양식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놀랍게도 이 건물은 영국 해군의 오래된 전함에서 나온 목재로 지어졌다. 시간의 흔적을 품은 목재 위에, 전통과 감각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셈이다. 이후 리버티는 독창적인 외관과 수공예적 감각으로 단순한 백화점을 넘어 브랜드의 철학이 담긴 공간으로 성장했다.
보라색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권위와 신비로움,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을 상징해왔다. 리버티는 이러한 컬러의 상징성과 감성을 조명, 패키지, 인테리어에 적극 반영하며 감각적인 브랜드 경험을 창조해왔다. 특히 밤이 되면 백화점 외벽을 감싸는 보랏빛 조명은 클래식함 속에서도 묘한 몽환성을 불러일으키며, 런던의 밤 풍경을 한층 더 우아하게 물들인다.
리버티 백화점은 런던 팝문화의 중심지 카나비 거리(Carnaby Street) 끝에 자리하고 있다. 1960년대, 이 거리에서 미니스커트가 탄생하고 ‘모즈룩(Mods)’이라는 젊은 세대가 패션과 음악을 뒤흔들었다. 이런 문화적 에너지는 리버티에도 스며들어 화려한 텍스타일 프린트와 실험적인 디자인을 가능하게 했다. 리버티 프린트는 단지 무늬를 넘어서 한 시대의 감성과 미감을 기록한 시각 언어가 되었다. 이들의 감각은 단지 패션을 넘어, 음악, 예술, 공간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리버티 백화점의 브랜드 세계관에도 녹아들었다.
최근 들어 리버티는 창립 145주년을 맞아 새로운 브랜딩 리포지셔닝을 단행했다. 여전히 보라색을 중심 컬러로 유지하되, 현대적인 감각을 반영한 타이포그래피와 컬러 배색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고전과 현대, 전통과 실험 사이의 균형을 보여주며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욱 또렷이 하고 있다. 리버티는 그야말로 시간을 입는 브랜드이며, 컬러를 통해 시대의 감성을 이어가는 문화 공간이다.
런던의 수많은 백화점 중에서도 리버티가 특별한 이유는 그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는 문화, 역사, 그리고 색이 공존하는 감각의 아카이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카이브를 걷는 순간마다, 보랏빛 감성에 물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4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며 리버티는 멈춰 있지 않았다.
2020년 리브랜딩에서는 초창기 간판의 타이포그래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Lasenby Sans를 도입했다. 산세리프체의 단정함과 고풍스러움이 공존하는 서체로, 전통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로고의 마지막 마침표(full stop)도 다시 등장했고, ‘London 1875’ 같은 헤리티지 요소는 리버티가 품은 시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리버티 안쪽 깊숙한 공간에 위치한 하버대셔리(Haberdashery)는 영국 부유층 여성들이 자수와 퀼트를 즐기던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실과 바늘, 단추, 리본, 트리밍...
작은 물성과 손의 감각이 중심이 되는 이 공간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을 불러 모은다.
무엇보다 50,000점이 넘는 프린트 원단 아카이브는 리버티가 단순한 리테일이 아닌, 텍스타일 문화의 보관소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시그니처 플로럴 프린트부터 실크, 코튼, 파스텔 염색 원단까지—
모든 것이 색, 패턴, 촉감이라는 감각의 언어로 배열되어 있다.
이곳은 누군가의 손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질 준비를 마친 색들의 공간이다.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이어질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리버티의 가장 아이코닉한 장소, 스카프룸(Scarf Room)에 이르면 우리는 다시금 색의 압도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 다섯개의 층 높이의 천장이 뻥 뚫린 그 공간은 단지 스카프를 걸어둔 진열장이 아니라, 컬러와 패턴이 울려 퍼지는 극장과도 같다. 벽면 가득 채워진 실크, 울, 캐시미어 스카프는 모두 리버티가 자랑하는 독창적인 디자인을 담고 있다. 2009년, 에르메스는 리버티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펼치기도 했다.
손으로 그린 플로럴, 아르누보 스타일, 추상적 패턴 등 시대를 초월한 감각이 직물 위에 흘러내리는 장면을 만난다. 리버티의 스카프는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다. 그것은 목에 두르기 위한 '천 조각'이 아니라 예술을 담은 물성이며, 리버티의 철학과 시간이 접힌 하나의 캔버스다. 무심한 듯 걸쳐진 스카프 하나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고, 그날의 감정을 말해주는 경험. 리버티의 직원들이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스카프를 직접 드레이핑해주는 장면은 이 브랜드가 얼마나 '감각의 전달자'이자 문화 해석자인지 보여준다.
리버티 백화점의 생생한 뒷모습은 2013년 Channel 4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시리즈 "Liberty of London"에서도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리버티의 크리스마스 시즌 준비 과정을 중심으로 매장 내외의 치열한 일상과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매니징 디렉터였던 에드 버스텔(Ed Burstell)을 중심으로 리버티의 직원들, 고객들, 그리고 공간 자체가 주인공이 된다. 특히 리버티 퍼플로 물든 매장, 실험적인 텍스타일 디자인, 개성 넘치는 고객층은 모두 브랜드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현실 다큐멘터리 포맷을 통해 리버티는 단순한 소매점이 아닌, 스토리와 감성,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하나의 문화 현장으로서 재조명된다. 화려한 쇼윈도 뒤에 숨겨진 기획 회의, 디자인 수정, 고객 응대, 마케팅 등 모든 과정은 ‘변화 속의 전통’을 실시간 드라마처럼 보여준다. 건물, 원단, 직원, 고객— 모든 요소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되고, 그 중심에는 늘 보라색이 흐른다. 리버티 퍼플(Liberty Purple)은 단지 색이 아니라 이 브랜드의 정체성과 정신, 그리고 태도다.
리버티 오브 런던은 1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순히 ‘전통’이라는 단어에 안주하지 않았다.
프린트 원단에서 에르메스와의 콜라보 스카프, 다양한 소재의 프린트 가방까지, 브랜드의 영역은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리버티 오브 런던은 늘 변화 속의 전통을, 전통 속의 혁신을 추구해왔다.
리버티를 걷는다는 것은 가장 아름답게 색이 늙어가는 장면을 마주하는 일이다.
빠른 속도와 자극의 도시 런던 속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가장 풍부한 감각을 경험하게 해주는 장소이다.
리버티는 늘 ‘오래된 것’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고, 예술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존중해왔다.
하버대셔리와 스카프룸, 그리고 그 모든 공간 사이에 흐르는 보라색 기운은
이 백화점이 ‘브랜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보라색에 물든 시간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