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롯백화점 컬러 브랜딩
런던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쇼핑백을 유독 많이 들고 다닌다. 특히 나이츠브릿지 근처에서 유독 눈에 띄는 초록빛 쇼핑백이 있다.
단정하고도 깊은 녹색 위로 흘러내리는 듯한 금빛 서체. 쇼핑백 하나만으로도 공간 전체가 떠오르는 브랜드—바로 해롯(Harrods)이다.
이 짙은 초록은 단순한 브랜드 컬러가 아니다. 런던이라는 도시가 지닌 전통과 품격, 그리고 영국 고유의 귀족적 정서를 담은, 하나의 시각적 서사다.
해롯 백화점 앞에서 그린 제복을 입은 문지기가 눈에 띄었다. 운이 좋으면 말과 마차를 볼 수도 있다 ㅠ
해롯에서는 이렇게 문지기를 마주하는 순간도 특별하다. 영국 백화점 중에서도 유일하게 전통 제복을 유지하고 있어, 문지기 하나만으로도 특별한 쇼핑 공간임을 느낄 수 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바로 그 웅장함에 숨이 멎는 듯했다. 330개가 넘는 부서와 20여 개의 레스토랑, 은행, 미용실이 한 공간에 들어서 있어, 마치 런던의 작은 도시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테라코타 외관과 아르누보 창문, 바로크 양식의 돔이 머리 위로 장엄하게 펼쳐지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간의 규모가 워낙 커서 그런지 휴대전화 신호가 잠시 끊기는 것도 신기했다.
공기 속에는 은은한 스파이스 향과 달콤한 차 향이 섞여 코끝을 스치며, 단순한 쇼핑이 아니라 오감을 깨우는 작은 모험처럼 느껴졌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샹들리에의 반짝임, 층마다 다른 색감과 장식,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바라보는 순간, 해롯은 단순한 백화점이 아니라 런던이라는 도시의 감각과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롯백화점 내 여러 층을 연결하는 이집트풍의 에스컬레이터와 바로크 양식의 돔, 아르누보 창문 등 화려한 건축 양식도 이곳의 중요한 볼거리이다.
우리는 해롯이 설계한 색의 세계를 거닐며 감각을 경험하고, 도시와 브랜드가 함께 쌓아온 시간의 결을 마주한다. 쇼핑백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고, 창문 너머 디스플레이 속에도 색으로 엮인 철학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대표적인 색상은 해롯 그린(Harrods Green)과 골드.
짙은 녹색은 외벽 차양, 로고, 쇼핑백, 패키지에 이르기까지 브랜드의 모든 접점에 사용된다. 이 컬러는 1967년 공식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해롯의 존재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해롯 그린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품격이 되었고, 금빛은 그 깊이를 더욱 고급스럽게 감싸 안는다. 두 색상은 브랜드 가이드라인에도 명시된, 일종의 시각적 유산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이 짙은 그린은 ‘British Racing Green’이라 불리는 전통 색상에서 시작한다. 영국 스포츠카의 컬러로도 잘 알려진 이 색은, 영국의 보수적이면서도 품격 있는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즉, Harrods의 초록은 의도된 전략이었다. 단순한 브랜드 컬러가 아닌, ‘국가적 감성’과 연결된 감각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해롯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전통적인 색채를 지키는 동시에, 시대의 감각을 반영하는 새로운 색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2019년, 해롯은 팬톤(Pantone)과 협업해 시즌별 테마 컬러를 도입했다. 피치 블룸, 허니 옐로, 슬로 진 피즈, 로렐 리프 등 현대적인 색조들이 쇼윈도, 상품 라벨, 인테리어에 입혀졌다. 그리고 2025년 S/S 시즌에는 초콜릿, 파우더 핑크, 선명한 레드와 마리골드 옐로까지—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색의 언어는, 해롯이 여전히 살아 있는 브랜드임을 말해준다.
해롯 백화점은 어린이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간다.
어린이 코너에 들어서면 대형 해롯 곰돌이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렇게 해롯은 어린 영국인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감성적으로 스며든다.
해롯 곰돌이 같은 아이템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해롯 안에서의 경험과 이야기가 담긴 작은 친구처럼 느껴진다.
해롯 어린이 코너는 8가지 테마와 독특한 색상으로 가득하다.
다양한 장난감이 진열된 공간을 거닐다 보면, 즉석에서 즐길 수 있는 체험존이 눈에 띈다. 아이들은 직접 만지고 움직이며 장난감을 경험하며 즐거워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보물찾기 행사와 다양한 이벤트가 열려, 공간 전체가 작은 축제처럼 변한다.
2018년, 영국 Channel 5는 "Inside Harrods: The World’s Most Famous Department Store"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통해 그 이면을 보여주었다. 누구보다 이 공간을 잘 아는 사람들—플로어 매니저, VIP 고객의 반려견을 챙기는 전담 직원, 수십 년을 함께해온 홍보팀까지. 브랜드의 고요한 품격은 바로 이들 덕분에 완성된다.
해롯을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 고객이 발을 들이기 전부터 그 공간을 빛나게 만드는 이들의 손길은, 어느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자신만의 철학으로 진열 하나하나를 조율하는 플로어 매니저, 매일 아침 VIP 고객의 반려견을 정성스럽게 챙기는 전담 직원,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해롯의 역사와 함께해온 홍보팀의 목소리까지—카메라는 그들의 일상을 조용히 따라간다. 화려한 브랜드의 이면에는, 일을 사랑하고 자부심으로 하루를 채우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심이, 해롯을 해롯답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해롯의 색이 런던이라는 도시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잿빛 하늘, 붉은 벽돌 건물, 절제된 거리 풍경 사이에서 해롯의 초록은 조용히 돋보인다. 과하지 않지만 선명한 존재감. 도시의 미감과 함께 진화하는 컬러 전략은 해롯을 단순한 매장이 아닌, 런던 그 자체의 일부로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