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집이 두 개 보이네요.”
“네?”
나는 산부인과 굴욕의자에 앉아 원장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기집이 두 개라니요. 저번주만 해도 분명 하나라고 했었는데. 원장님은 초음파 화면 속 강낭콩 두 개를 가리켰다.
“보세요. 여기 하나 있고, 여기 하나 더 있죠? 쌍둥이네요.”
원장님의 목소리가 밝았다. 산모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국내 최대의 난임병원. 그것도 인기가 많은 원장님은 시험관 시술 한 번에 내게 쌍둥이를 선사하셨다.
“네....”
나는 중얼거리듯 대답하고 굴욕의자에서 내려왔다. 원장님에게 따질 수도 없는 게, 앞서 인공수정을 하면서 쌍둥이를 가질 수 있다는 종이에 서명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난임 시술을 하면서 쌍둥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숙지한 상태였다.
아무리 그래도....나는 아닐 줄 알았다.
단 한 번도 내가 쌍둥이를 가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3년간 임신 준비를 하면서 임신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본 적이 없었고, 인공수정도 세 번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잘 되어도 한 명만 갖게 되리라 믿었다.
외동을 낳아 키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내 가족계획이었다. 세 자매로 자라 늘 외동이 부러웠고, 내 아이는 외동으로 낳아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이는 최대한 늦게 낳아 한 명만 키우자는 생각이 강했다. 내 시간을 육아에 너무 많이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집과 차, 수입 등 모든 것은 나와 남편 그리고 외동 아이, 이렇게 세 가족을 위한 것으로 준비돼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네 가족이라니.
임신이 되어 기뻤던 마음은 잠시, 쌍둥이 임신인 걸 알게 됨과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 시작됐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압박이 컸다. 돈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자는 신조로 지내왔다.
돈은 최소로만 벌었다. 쌍둥이를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아 프리랜서로 일하던 회사에서도 해고 통보를 해왔다. 아이 때문에 잘린 건 아니었지만, 시기가 안 좋게 겹쳤다.
외벌이로는 네 식구가 살 수 없다. 당장 집도 좁고 방도 부족하다. 카시트와 유모차가 들어가기에 차도 작다. 뭐든지 최소로만 살았기 때문에, 아기도 최소로만 낳았어야 했다. 그러나 유독 가족계획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서 걱정만 했다. 일주일마다 한 번씩 웃는 날도 있었다. 바로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볼 때였다. 보이지도 않던 아기들이 콩알 같았다가, 애벌레 같았다가, 꼬마곰이 됐다. 작은 팔 다리를 흔들어대며 꼬물거리는 것을 볼 때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다.
내 마음이 어떻든 아기들은 열심히 자라고 있고, 나는 임신에 성공해 드디어 엄마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