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쌍둥이라 좋겠다. 부러워.”
주변 친구들이 내 임신소식을 듣고 한 말이다. 쌍둥이가 부럽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늘 외동인 친구들이 부러웠다. 외동은 모두 새 장난감을 받고 새 옷을 입었다. 부모님의 관심도 오롯이 혼자 다 받았다. 그래서 나는 한 아이만 낳아 내가 받지 못한 것들을 주고 싶었다.
부럽다는 말을 들으면 고맙다고 대답을 한다. 누군가는 원하지 않는 일도,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내 임신을 축하해주니 당연히 고마운 일이다.
“근데 쌍둥이가 왜 부러워?”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다. 그러면 친구들은 대부분 이렇게 답한다.
“둘째까지는 낳고 싶은데 나이도 많고, 회사도 가야하고.”
둘째까지 낳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한번에 둘을 낳아 키우고 싶다는 것이다. 내 나이가 삼십 대 후반이다 보니 최근에 첫째를 낳은 친구들도 꽤 노산이다. 게다가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커리어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직장을 포기하기도 힘들다.
둘째까지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이 둘은 키울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회사는 아이 하나는 키울 수 있는 배려를 해주지만 두번째까지는 아니다. 복지가 잘 되어있는 회사가 아니라면, 두번이나 육아휴직을 내기는 쉽지 않다. 아직 우리나라 문화가 그렇다.
첫째까진 괜찮지만 둘째는 안된다.
회사는 최소한의 출산과 육아만 허용한다.
친한 선배는 첫째가 초등학교 입학할때 둘째를 낳았다. 출산휴가를 다녀와서 워킹맘으로 지냈다. 그런데 첫째가 초등학교에 적응하려면 엄마의 손이 더 필요했다. 이제 막 태어난 둘째는 더욱 그랬다.
선배는 몇달만 출산 휴가를 쓰겠다고 했는데 거부당했다. 직장 상사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네가 또 휴가를 쓰면 다른 여직원들도 그렇게하려고 할 거야. 선례를 만들면 안 되지.”
그래서 선배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둔 게 아니었다. 회사가 그녀에게 ‘시간’을 주지 않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10년 넘게 다닌 회사였다.
출산율이 저조하다는데, 워킹맘들에게 아이를 키울 시간도 주지 않으면 누가 아이를 낳으려 할까.
그 ‘시간’의 문제 때문에 그녀들은 한번에 둘을 낳고 싶어한다. 쌍둥이 임신이 몸이 더 고달프고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