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완 Aug 25. 2023

임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나쁜엄마일까

모성애에 대하여



임신을 하고 나서 나는 외로웠다.


젊은작가상을 탄 어느 작가가 소감문에 적은 말이었다. 그때 그 문장을 읽으면서 임신이 외로울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 했다.


임신은 오롯이 혼자의 몫이다. 가슴이 쳐지고 배가 불러오는 것도, 호르몬의 노예가 되는 것도, 출산의 고통을 겪는 것도.


아무리 주변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대신 이 일들을 대신 겪어줄 순 없다. 임신은 외로운 일이다.


혼자 겪는 일이기 때문에, 임신에 대한 생각도 감정도 오롯이 혼자 느끼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임신을 하면 행복할 거라 여긴다. 임신을 준비하는 여자도, 임신을 한 여자도 이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모성애’에 대해 일관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아기를 갖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한 일이라고. 엄마는 아기를 위해 힘들어도 참고 희생해야 한다고. 그게 바로 모성애라고.


우리의 머릿속에 ‘엄마’라는 존재는 주체적인 여성이라기보다 희생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강하다. 우리가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짓는 것은 바로 그 ‘희생’때문이리라.


나도 이런저런 가족의 문제를 겪으면서 부모란 아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을 거면 낳아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거의 강박적으로 생겨났다.


임신 기간 동안 먹덧과 임신성 당뇨 기간을 제외한 한 달 정도만 ‘나’로서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누가 임신이 어땠냐 묻는다면 딱 한 달만 행복했다고 말한다.


나머지 시간은 행복하지 않았다.


뱃속 아이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실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태동에서도 남들이 말하는 ‘교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보려 노력했으나...뱃속에서 이상하고 썩 좋지 않은 감각만 느껴졌다.)

아이들은 내게 몸을 공유하는 이상한 존재들. 고통을 동반한 이질적인 경험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원래도 나는 어린 아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지켜줘야할 존재라는 생각보다 그냥 징징대는 작은 사람으로 보였다.


임신을 하고 나서 전보다 다른 아기들에게 애정을 갖게 되었지만, 처음 보는 아기를 정말 예뻐하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성애가 없는 걸까.


‘모성애=엄마가 될 자격’처럼 느껴져서 이 문제는 꽤나 나를 우울하게 했다.


임신을 행복해하고 육아에 있어서 인내와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그게 안되면 모성애가 없는 걸까.


모성애가 뭐길래?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지 되짚어봤다.


결혼 이후 막연하게 아이를 갖는다면 이런 엄마가 되어야지, 하고 생각해온 것이 있다.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나는 아이가 건강한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도록 돕고 싶다.


자존감이 높고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내게 모성애란 그런 것이다. 올바른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는 것. 부족하지만 내 아이들보다 생을 한 걸음 더 나아간 어른으로서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


그러면서 나도 배우고 성장하는 것.


나의 모성과 행복은 아이들과 만나 관계맺기를 통해 서로 성장하는 것에 있다.


임신이 개인적인 경험이듯 모성애도 개인적인 영역이다.


엄마라고 해서 임신을 인내하고 행복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 아니다.



















 





이전 05화 그녀들이 쌍둥이를 원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