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제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두 남녀를 억지로 묶어놓고 그 안에서 희생하면서 철저히 손해보게 만드는 구조라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의 싸움과 이혼을 지켜본 목격자이자 방치된 자식이라는 피해자 입장으로, 내 생각이 결혼의 진실에 가깝다고 믿었다.
결혼을 추종하는 이들은 결혼에 대한 실패를 목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상대를 잘못 선택했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오로지 결혼의 꽃길만 보아온 사람들이라고. 그런 결혼을 곁에서 지켜본 행복한 부모의 자녀들이라고.
"쟤넨 정말 결혼을 모르네. 자기도 자기 부모 같은 상대를 만날 줄 아나봐. 부모는 운이 좋아서 서로 좋은 사람끼리 만난 거지. 잘못 만났어봐. 우리 부모처럼 됐을 걸."
샘이 났다. 아름다운 미래만을 그리는 그애들의 마음이 부러웠다.
나는 그 애들 앞에서 결혼은 낡은 제도고 여자가 희생하는 구조라며, 근대기 신여성처럼 구는 방식으로 내 안의 사납고 비딱한 시선을 감췄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기댈 곳을 찾았다. 가족이라는 지지대가 없으니 바깥에서 지지대를 찾으려 했다. 내게 희생적인 남자가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계속 희생을 요구하며 사랑을 확인했다.
그 사람과 결혼할 마음이 없으면서도 나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만 애인으로 삼았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아무리 관심이 가도 선을 긋고 다가가지 않았다.
그런 내게 한 사람이 들어왔다. 지금의 남편이다. 남편은 생색내지 않고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소개팅날, 함께 식사를 하고 일어서는데 남편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자기 쪽으로 당겨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기 쉽게 해주었다.
연애를 할땐 함께 드라이브를 하다가 내가 이 노래 좋다,고 하면 말없이 볼륨을 높였다. 남들은 별것 아니라며 넘길 수 있지만 나는 이런 배려가 고마웠다. 매너가 좋으려고 의식한 게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해 무심코 한 행동들이어서 좋았다.
남편을 만난 이십대 후반,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 시절에도 집은 늘 나를 불안하게 했다. 언니가 시집가고 난 후 아버지는 더 과감하게 여자를 만났다. 아버지는 맞딸 눈치는 봤지만 나머지 딸들은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여자를 만나는 걸 노골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사이가 가장 좋지 않았다. 일하고 최대한 집에 늦게 들어갔다. 학창시절 그랬듯이 해가 지고 모두가 잠자리에 들 시간 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내 방에 틀어박혔다.
어느 날은 너무 피곤해 퇴근하자마자 집에 갔다. 저녁 7시쯤 되었을 것이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열리지 않았다. 아빠가 집에 있었다. 만나는 아줌마와 함께. 아빠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들어올까봐 도어락을 잠근 것이다. 외롭고 우울했다. 내게는 집이 있지만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부모가 있지만 없는 것과 같듯이.
거리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남편에게 연락하자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와주었다. 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남편도 캐묻지 않았다. 카페에 마주 앉아 오랫동안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나는 남편 같은 사람이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의 아버지가 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증명하는 성숙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얼굴을 보면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되었다. 함께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었다.
행복과 불행에도 균형이 있구나.
그래서 내게 이 사람이 왔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