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결혼식날이었다. 아버지의 애인 문제로 언니가 쓴소리를 하자 아버지는 우리와 연락을 끊었다.
동생의 결혼식날 아버지를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사위 앞에서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정하게 내게 인사했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늘 이런 식이 었다. 아버지는 외부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겼다. 내부가 아무리 곪아 있어도 바깥에 드러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동생의 결혼식날은 친척들이 많이 참석했다. 엄마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였기 때문에 모두 아버지쪽 손님들이었다.
어릴 때 보았던 얼굴들이 결혼식장에 하나 둘 나타났다. 그 얼굴들이 반가웠다. 곪지 않았던 시절에 보았던 얼굴들. 늘 나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고 아주 가끔 용돈도 쥐어주던 얼굴들. 우리 가족이 행복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친척들은 우리집 사정을 몰랐다. 아버지 혼자 세 딸을 정성들여 키워 결혼까지 시킨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친척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어릴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독립하기 전까지 가끔 아버지와 친척집에 갔다. 친척들은 늘 내게 ‘아버지에게 잘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생의 결혼식날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 있었다. 안암동에 사시는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어린 시절 안암동에 살며 큰집과 자주 교류했기 때문에 안암동 큰아버지는 내게 각별한 분이었다. 돌아가신 게 동생의 결혼식 일주일 전이란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부고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결혼식날 사촌오빠 내외에게 연락처를 받아 사정을 이야기했고, 부조를 했다.
그리고 큰집에 가서 처음으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대화가 어딘가 이상한 방식으로 흘러갔다.
“네 엄마가 좀 특이했잖니.”
“네 엄마가 아빠를 너무 많이 좋아했어.”
“신혼때부터도 네 엄마가 아빠를 늘 의심했어.”
큰집에서는 부모님의 신혼시절부터 지켜봐왔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네 아버지가 그럴줄 몰랐는데 정말 실망이다, 라는 말도 오갔지만 어머니와의 부부싸움 이야기에 가려져버렸다. 결국 두 사람 다 문제라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
집에 돌아와 한참이 지나자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엄마 아빠의 갈등이 아니었다. 나와 아버지의 갈등이었다. 이혼 후 아버지가 자식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였다.
인과응보. 아버지의 죄를 낱낱이 고하고 민낯을 까발리고 싶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 마음속에 남은 것은 왜 그자리에서 친척들은 엄마를 뒷담화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특이한 여자였다고 해도 결국 춤바람이 난 건 아빠인데.
그리고 정말 엄마는 이상한 여자였을까. 적어도 나에게 엄마는-물론 특이하긴 했지만-그정도는 아니다. 허영심이 있고 남아선호사상이 심했지만 자식에게 헌신적이었고 삼시세끼 가족의 끼니를 챙기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엄마의 헌신을 통해 자라났고, 엄마가 알코올중독으로 자식들을 버렸을 때도 예전의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며 20대를 버텨냈다.
엄마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듣고 나니 친척들에게 연락하기가 꺼려졌다. 그날 이후 엄마의 이상함보다 엄마가 안암동에 살며 받은 상처가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안암동에서 얼마나 고립되었을까. 남편의 문제를 고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모두 아빠의 말을 더 믿었을 테니까.
엄마가 엄마 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는 늘 외로워했고 아빠와 싸움이 심해진 뒤로 술을 친구삼았다. 엄마는 아빠의 사랑으로만 자신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엄마는 엄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혼 후 엄마가 떠나고 아빠도 애인이 있다는 걸 알게되자 나는 외로워졌다. 오랜 시간을 외로움 속에서 지내면서 깨달은 게 있다.
타인의 사랑으로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나만이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
내가 내편이 되어주어야 한다. 내가 나를 위로하고 보살펴주어야 한다. 진심으로 내가 나를 위해 살아갈 때, 삶이 온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