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에 갓 진입했을 때 큰아이가 일기장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 나는 도통 알지 못한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아이는 나를 향한 욕을 일기장에 썼다. 확실하다. 그리하도록 내가 아이에게 권하고 허락했기 때문이다.
십 대가 된 큰아이는 우리 부부가 생각하기에 별것 아니다 싶은 것에조차 격하게 반응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아이에게 특히 남편은 져 주지를 못했다. 아이와 남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다가 나는 아이를 몰아세웠다. 그러면 아이는 세상에 둘도 없이 억울해하며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욕을 씩씩거리며 잘근잘근 씹었다.
일기장에 쓰라고 했다. 입 밖으로 욕을 뱉는 건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것 같고, 일기장에는 뭐든 써도 된다고 아이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아이는 보란 듯이 걸핏하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닫힌 방문에 바투 다가서서 귀를 갖다 대고 숨을 죽이면 아이가 공책에 써 내려가는 속도대로 느리게 웅얼거리는 욕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방에서 되나오는 아이의 얼굴을 볼 때면 썩 괜찮은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거칠게 발을 구르면서 제 방으로 들어갔다가도 단 몇 분만에 아이는 방 밖으로 나오면서 씨ㅡ익 웃으며 나랑 눈을 맞췄다. 욕하는 걸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것이 마냥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국민학생 시절에 써야 했던 일기 숙제를 나는 귀찮아하면서도 동시에 좋아했다. 진종일 놀아서 때마다 신났던 나날을 저녁 때면 굳이 기억을 떠올려 기록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하루이틀을 미루다가 한꺼번에 몰아서 쓰려면 더할 나위 없이 귀찮았다. 그런데, 그 많은 재미난 일과들 중에 한 가지나 두 가지만 꼽는 게 영 귀찮아서 책이나 만화 속의 주인공에게 편지를 쓴다거나 시를 쓰거나 담임 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걸 질문으로 남기는 건 참말 즐거운 일이었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의 일인 것 같은데, 이웃에 사는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잔 날이 있었다. 지금 열 살인 나의 작은아이도, 작은아이의 친구들도 번갈아 가면서 초대하고 초대받으며 파자마 파티라는 걸 하는 걸 보면 고만한 나이 때는 제 집이 아닌 친구네 집에서의 하룻밤이 근사한 모험이라도 되는 가 보다. 나도 그랬다.
다다다닥 붙어서 살던 이웃지간이었기에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싹 씻은 다음 잠잘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은 채 친구네 집으로 내 몸만 쏙 들어가면 되었다. 보통 집집마다 아이가 둘셋이 있었는데, 제 방을 가진 아이는 거의 없었다.
내 친구 말고도 그 방의 주인인 친구의 여동생과 남동생까지 껴서 손게임도 하고, 무서운 얘기도 하며 밤이 늦도록 쫑알쫑알 대도 다른 집 아이가 놀러 와서 자는 그런 밤에는 일찍 자라는 말을 어른들이 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전등에 의지해 줄줄이 꼭 붙어서 바깥의 시커먼 화장실에 다녀오면 그게 취침 직전의 최종 일정인 셈이었다.
이튿날에 내 집으로 돌아갔을 때까지 간밤의 여흥이 가시지 않아서 나는 일기장을 펼쳤는데, 여흥이 종이 위에서 과했다. 분명히 어머니가 허락해서 친구네 집으로 건너가 잤던 것임에도 나는 일기장에다 쓰기를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의 문이 잠겨 있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친구네로 가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고 썼다.
그때 고기잡이를 했던 아버지는 자주 타지의 바다로 나가서 작업을 하다가 한두 달만에 집에 오셨었다. 때마침 집에 온 아버지가 어쩌다가 내 일기장을 훑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전혀 모르겠고 미미한 의처증이 있던 아버지는 가시지 않은 흥으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친 나의 일기를 읽고서 그날 밤에 아이들만 두고 어디를 다녀왔길래 문까지 걸고 간 거냐며 어머니를 추궁해 댔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요함이 진정되자 어머니는 나를 나무랐다. 왜 그런 거짓말을 썼냐며.
왜 썼냐고요?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맘껏 상상해서 쓰는 건 신나고 행복한 일이니까요.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마다 밥상과 식기가 내동댕이쳐졌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술주정을 부리는 아버지를 피해 그 밤을 다른 집에 가서 숨어 있어야 했다.
그런 집의 문을 커다란 자물쇠로 바깥에서 걸어 잠근 것만으로 어린 나는 안심이 되었을 거다. 그리고 요런 이야기를 쭉 이어서 쓰려고 하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 굳게 잠겨있던 그 집엔 괴물이 갇혀 있었고 그 사실을 잊은 누군가가 호기심에 자물쇠를 부순다. 그 순간 괴물이 풀려나고 영웅이 나타나서 그 괴물을 무찌른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을 말이다. 아, 그리고 죽은 괴물의 꿈틀대는 배를 갈랐더니 그 속에서 아름다운 공주가 나왔다. 바로 나.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가장 먼저 나를 앉혀놓고 나와 대화를 하지, 왜 두 분이서 푸닥거리를 하신 건지. 그 바람에 나는 일기장에 일기다운 일기만 썼다. 일기장이 다양한 작문의 공간이었던 나에게 어릴 적의 이 일은 일기가 더 이상 즐겁고 재미진 것이 아닌 귀찮은 것으로만 여겨지게 만들었다.
내 큰아이처럼 욕도 벌이고, 시도 짓고, 편지도 쓰고, 거짓말로 보일지라도 딴에는 그럴싸한 짤막한 동화를 만드느라 연필 가는 대로 끄적일 수 있었던 나의 일기장을 부모님이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 때가 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