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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더 Jul 05. 2023

흔쾌히 기쁘게

   여덟 살, 아니면 아홉 살쯤 된 사내아이가 동네의 문방구에 들어섰다. 집에 손님이 다녀갈 때나 고 조그마한 손에 쥘 수 있었던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섰다. 빳빳한 비닐 포장지에 싸인 새빨간 조화 한 송이를 고르고는 들고 있던 천 원으로 계산을 했다. 문방구 안에는 한 개에 십 원밖에 하지 않는 갖가지 군것질이 수두룩한데도 아이는 천 원짜리 조화를 골랐다. 그리고 두둥실 떠오르는 풍선같이 부푼 가슴으로 집으로 내달렸다.


   이게 뭐꼬? 이게 뭐냔 말이다! 천 원을 이기 사는 데 다 썼노, 잉?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듣게 되는 남편의 어린 시절 얘기. 매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남편이지만, 나에게 말한 횟수만큼이나 그 일은 남편의 가슴에 진하게 배어 있는 것 같다. 고 나이 때 쉽사리 물리칠 수 없는 군것질거리들을 제쳐놓고 단연 조화 한 송이를 고른 건 엄마를 주기 위해서였단다. 시어머님은 아들의 마음을 묻지도 않고 그저 나무랐다. 한없이 쪼들리는 살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걸 사온 아들이 야속했으리라.


   차라리 지 입에 들어갈 기나 사 왔이면 모를까, 이 이기 뭐꼬?


   하루는 언니가 커다란 자루를 메고 문 밖에 와 섰었다. 다닥다닥 붙은 1층짜리 시멘트 집들 네댓 채가 슬레이트 지붕으로 연이어져 있었고, 가장 끝에 자리한 집이 우리 집이었다. 문이라고 해봐야 열어젖히면 곧장 사람이 다니는 길이요, 닫아걸면 집이 되고 방이 되는 창호지 바른 방문이 다였다.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쬐던 날로 기억한다. 방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엄마는 무거리를 찢고 있었다. 오징어채말이다. 간장이나 고추장을 넣고 볶거나 무치면 맛깔스런 밑반찬이 되는 그 오징어채를, 가공하는 공장에서 받아온 대충 잘린 뭉턱뭉턱한 오징어살을 잘게 찢어서 만들고 있었다. 요샌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땐 사람 손으로 일일이 찢어야 오징어채가 되었다. 방문을 활짝 젖혀놓고 무거리를 찢고 있는 엄마 앞에 익숙한 자루를 끌고 언니가 와 섰었다.


   자루의 정체를 한눈에 단박에 알아챈 엄마는 이리저리 무언가를 정신없이 찾더니, 마침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허리띠를 잡았고 다짜고짜 언니한테 달려들어 휘둘렀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필 날카로운 톱니 같은 허리띠의 이빨 부분이 언니의 정수리에 박혔다. 모르긴 몰라도 엄마 당신도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자식새끼들은 궁핍한 당신의 삶을 되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짬이 날 때마다 무거리를 찢는 거였다. 그런데 동생들한테 본이 되게 가장 잘 자라줘야 하는 맏이가 당신의 것과 같은 무거리 자루를 공장에서 받아왔으니 앞뒤 정황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궁핍이 궁핍을 낳은 것 같은 울분이 치밀어 뭐라도 손에 쥐었던 것일 게다.


   그리고는 엄마가 언니한테 계속 화를 냈는지, 약을 발라주었는지, 우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그저 나는 속으로 언니처럼만 하지 말자고 마음먹고 있지 않았을까. 언니는 도대체 무거리 자루를 왜 가져왔던 것일까.


   어판장에서 칼같이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물에 걸린 생선을 종일 벗겨내고, 얼음장 같은 찬물에 생선을 씻어서 두 마리씩 아가미를 꿰어 줄에다 척척 널고, 튿어진 그물을 보망하는 일은 추운 계절의 어촌에서 아낙네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외의 계절에는 부업을 해야 했는데 무거리를 찢는 것도 그중에 하나였다.


   딱히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놀릴 수만은 없는 날들이었다. 그런 엄마의 날들을 줄여주고 싶었던 걸까. 가계엔 돈이 되지 못할지언정 자기의 용돈은 충분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볼 때마다 엄마가 하고 있는, 엄마가 중요하게 여긴다 싶은 일을 자기도 같이 하면 엄마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이유가 뭐가 되었건 언니는 엄마한테 혼이 날 거라는 예상은 손톱만큼도 못했던 것 같다. 언니는 자루를 자기 옆에 두고 어깨를 쭉 편 채 엄마 앞에 섰었다.

   

   그게 뭐니? 그걸 왜 가져왔어? 니 마음은 알겠는데, 도로 갖다 줬으면 좋겠어.


   이게 뭐꼬? 이걸 왜 샀노? 에고 내 새끼뿌이네. 그라도 댐부턴 이란 거 사지 마래이.


   먹고살 걱정이든, 또 다른 커다란 걱정 때문이든, 아니면 너무 바빠서 아이와의 로맨틱한 순간을 놓히며 살고 있진 않은지 나를 돌아본다. 오직 부모한테 고 어린 생의 모든 에너지를 조준해서 부모를 위해 준비하는 갖가지 것들 ㅡ 색종이 카네이션, 심부름 쿠폰, 설거지하다가 깬 컵, 꼬깃꼬깃 모은 용돈으로 사 온 (향이 별로라 본전 생각이 나는) 향수 등등 ㅡ을 그저 누려야겠다. 아이가 자진하여 마련한 것을 나는 그저 즐기면 된다. 순도 무한 %의 사랑에는 기쁨 외의 다른 반응은 않기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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