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라, 아티스트처럼》《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제주도 가시는군요, 필화님. 좋으시겠다.
저는 여행을... 분명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여행 따윈 사라진 지 오래인 삶을 살고 있군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게 중요했던 어떤 단어가, 혹은 해시태그가 삶에서 어느덧 하얗게 바래어가는 걸 문득 깨닫는 기분은 씁쓸함에 가깝군요. 쓰고 보니 그런 것도 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내 삶에서 어떤 단어들이 드나들이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떤 낱말들이 떠나고, 또 어떤 낱말들이 제 인생 속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을까요.
필화 님의 메일을 읽다가 마르셀 프루스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견에 관한 수많은 명언이 있겠습니다만, 역시 이것이죠.
The real voyage of discovery consists not in seeing new sights, but in looking with new eyes.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가 줄여 놓은 것이고, 실제 영역(그야 원문은 프랑스어일테니까요...)된 문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The only true voyage of discovery, the only fountain of Eternal Youth, would be not to visit strange lands but to possess other eyes, to behold the universe through the eyes of another, of a hundred others, to behold the hundred universes that each of them beholds, that each of them is;
단 하나의 진정한 여행, 단 하나의 ‘청춘’의 샘은 새로운 풍경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고, 타자의 눈을 통해 다른 수백 명의 눈을 통해 우주를 보며, 그들 각각이 보고 그들 각각이 존재하는 수백 개의 우주를 보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p.114
달리 말하자면 예술이란 어쩌면 각각의 예술가들이 조형한 그들의 세계관일 겁니다.
화가이건 극작가이건 작곡가이건, 그들 하나하나의 ‘멋진 원더랜드’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찌 예술과 유리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세계에 갇혀 살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나 긴 걸요.
우리는 현실을 떠나 종종 한눈을 팔 수 있기를 늘 소망하지 않던가요. 가상의 여행으로라도 말입니다.
새로운 눈을 갖는다는 것은 역시 낯설게 본다는 것과 비슷한 뜻일 겁니다. 낯설게 보기의 대가는 예술가들이겠지요.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데페이즈망의 대가 르네 마그리트를 들 수 있겠지만, 뒤샹의 <샘> 역시 데페이즈망적인 구석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한 양식의 선구자는 무릇 욕을 배불리 먹게 마련인데, 뒤샹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지요. 그러나 그 덕분에 예술은 또 한 번 도약의 계기를 맞습니다.
인상주의의 확고한 팬인 큰아이가 뒤샹을 몹시 싫어하는데, 왜 그의 작품이 의미가 있고 의의가 있는지 여러 번 설명했으나 ‘그래도 싫어. 아름답지 않아’라고 강경히 말하는 데서 예술의 주요한 가치를 무시하고서는 참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기가 어렵지 않은가...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감을 충족시키는 것 말이지요. 스토리텔링으로 말하자면 꽉 닫힌 해피엔딩이랄까요. 어쨌거나 말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새로운 면에 주목할 수 있는 감각은 어떤 면에서는 타고난 예민한 천성처럼 보이지만, 저는 훈련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난한 연습과 노력이 동반된다는 가정하에.
그런 의미에서 예술에 관련된 실용서라고 할까, 조언이라고 할까... 어느 쪽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으나 그 두 쪽 모두 다 해당사항이 있을 것 같은 얇고 가벼운 책을 하나 가져와 보겠습니다. 실컷 무거운 이야기를 했으니 책은 가벼워도 괜찮을 것 같아요.
훔쳐라, 아티스트처럼
도발적인 제목이죠?
제목만 봐도 저자는 창의성이란 결국 어떤 개념과 개념의 접합이라는 정의를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그러한 정의에 두 손을 모두 다 들어주는 쪽이거든요. 제게 창의성이란 일종의 용접 기술입니다. 노하우와 숙련도가 중요하다는 점까지 몹시 비슷하거든요.
이건 사족입니다만 이 책을 번역한 카피라이터는 저의 대학 시절 동아리 후배입니다. 목소리가 명랑하고 귀여운 친구인데 덕분에 이 책을 읽었던 당시 오디오북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읽을 때 저자(혹은 역자)의 목소리가 자동 재생되는 건 자주 겪는 건 아니지만 겪을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유의 문체를 가진 사람일수록 오디오북 기능이 자동으로 활성화되더군요. 뭐, 그건 그렇고.
초반에 딱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마르셀 뒤샹은 “난 예술을 믿지 않는다. 예술가들을 믿는다”고 했다. p.23
오오, 역시 그런 역발상적인 작품을 낼 정도의 기개가 있는 분이 하실 법한 말씀 아닙니까? 한편으로는 지당한 이야기이지 싶기도 합니다. 예술이란 실체보다는 하나의 추상이고, 예술가는 개별적 실천자 아니겠습니까. 각자의 신념의 실천자죠.
현실적인 조언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만약 ‘나는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답부터 구한 다음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을 시작하려 했다면, 아직도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내 존재에 대한 고민만 계속하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경험으로 볼 때, 뭔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와 과정 자체에서 내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p.35
작가로 오래 활동한 건 아니지만 내가 배운 점이 있다. 진짜로 작품으로 뻗어나갈 뭔가는 사이드 프로젝트에 있다는 것이다. 사이드 프로젝트란 그냥 미적거리고 있는 일들이다. 그냥 심심해서 해보는 일들이다. 그런데 그 일들이 사실은 진짜 좋은 소재가 된다. 그런 일들이 마법을 부린다. p.73
제가 믿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생각만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필화 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일단 해봐’ 주의자이고, 제 동행은 실로 엄청난 ‘완벽한 계획주의자’입니다. 아마 동행께서 보시기에 저는 ‘일은 벌이는 것이고, 수습은 하나씩 한다’는 무뎃포(無鐵砲)겠죠. 저 나름으로는 분명히 생각이 있는 것인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겁니다. 반면에 저는 ‘저렇게 생각만 해서 실천은 도대체 언제 하나, 완벽한 계획서를 안고 관뚜껑 덮은 다음에, 다음 세상에서?’라고 생각하죠. 인생은 실전 아닙니까?
저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갖고 안달복달하기보다 재빨리 자신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 효과적인 대비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해 완벽한(하다고 생각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이유는, 그 완벽한 계획은 ‘현재의’ 환경과 기준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이 그대로 유지될 거라고 과연 누가 생각하나요? 전문가는커녕 일반인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저는 항상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믿지 마라,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나 자신을 바꾸어 나가라. 그러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답을 예술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적 예술과 대중적 예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간이 고민하는 바와 지향하는 바를 모두 품고 있으니까요.
와, 말이 자꾸 길어지네요. 두서는 없고. 하지만 이건 오래 전 우리의 머리를 쥐어뜯게 했던 학위논문이 아니니까 이리 튀고 저리 튀어도 상관없겠지요? 애초에 그렇게 편한 잡담 같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프로젝트였으니까요(저만 그렇게 생각할지도).
우리의 서신교환을 통해 필화 님도 존재적 이해를 보탤 수 있는 어떤 단초를 찾을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이에요!
담화님 안녕
삶에 드나들이를 하는 단어들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은 아주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이미 데이터로 흔적을 남기고 있을 테니 사실 어쩌면 빅데이터만 잘 살펴보아도 근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단어들도 빅데이터가 보관해 줄 수 있을까요?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며칠 전 담화님의 집에 놀러 간 것이 생각해 보니 무려 20여 년 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네요. 맛있는 밥도 감사했고, 오랜만의 대화도 아주 즐거웠습니다. 다정하고 친절한 아이들도 너무 반가웠고 말이지요.
담화님의 공간은 담화님을 닮았더이다. 밝고, 구석구석에 섬세한 디테일로 가득 차서 생기가 가득한 공간이었습니다. 공간이 사람을 닮았다는 것, 사람의 어떠함을 보여준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니 시각으로 새겨지는 영롱함이 있었다는 얘길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답장이 많이 늦었지요?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주 먼 곳에 왔지만, 더 늦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답장을 쓰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난 담화님의 메일을 보고 저는 데이비드 베일즈와 테드 올랜드의 《Art and Fear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책과 나가오카 겐메이의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는 책 두 권을 같이 다시 한번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하라 켄야와 함께 하라 디자인연구소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일본의 대표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면서도 디자인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본인이 좋아하는 디자인 오브제를 전시하는 공간을 오픈했고, 십 수년이 지난 지금 D&DEPARTMENT이라는 이름의 이 전시공간은 일본 전역에 약 20여 개의 전시장을 갖고 있게 되었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서 아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고 일단 두려움 없이 시작한 자신의 디자이너의 삶과 일에 대해서 책 한 권을 통틀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저 좋아서 시작했던 일이니만치 열정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인사와 경영 업무에 대한 이야기까지 언급합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이 전체 과정을 꾸준히 기록해 두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책을 이루었다는 것이지요. 이 책은 기록물인 동시에 출판물이고, 홍보물이기도 합니다.
《Art and Fear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그러나 저는 오늘《Art and Fear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담화님이 말씀하신 단 하나 그것입니다.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뿐이 아닐까? 그 나머지는 인내의 문제이다.” P.20
중단은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예술활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두에 나오고 그 이후로는 그 여정 가운데 예술가가 마주하게 되는 많은 이슈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재능, 완벽, 인정’의 세 가지 함정의 불확신과 욕구에 대해서 주목해 보았습니다.
이 세 가지 허들만 해도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그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손을 놓고 포기해 버릴지 어림짐작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예술 작업 주기에서 반복되는, 정상적이며 건강한 일반현상이다. p.25”
‘예술작품은 완벽해야 한다고 믿게 되면 점차로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확신에 잠식당하고 만다. 이렇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면 시작했던 일을 포기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p.53”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풍요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직업인’으로서의 예술은 또 다른 세계이겠지요. 포기하지 않고 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말입니다.
“아름답거나 의미있고 감동적인 예술을 창조하려는 욕망은 그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생과 예술은 일단 뒤엉키면 쉽게 떼어내기 힘든 것이 되고 만다…. 예술 창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순간, 갖가지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 시작한다. …
나는 예술가가 아니라 사기꾼이다.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확신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낫다.
나는 그저 학생, 엄마 등등에 불과하다.
나는 전시다운 전시를 해본 적이 없다.
아무도 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도 내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p.31
31쪽에 그려둔 이 예술가의 참회록 같은 한 마디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저는 지금 책 한 권을 더 듣고 있습니다. (여러 권을 언급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쩔 수 없네요. 뭐 우리의 편지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베스트셀러를 지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는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삶을 경험해 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만약 예술을 포기해 버린 수많은 ‘전직’ 예술가들이 다시 그 삶을 향유해 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빨리 ‘성장’이라는 궤도를 선택해 버린 나머지 문화지체현상에 빠져버린 대한민국에서의 삶이 조금은 더 풍요와 여유로 가득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성장이 더디더라도 충실히 모두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천천히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문화는 어떤 색이었을까요?
담화님은 과거에 하지 않았던 선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 삶에 대한 미련이나 동경이나 후회가 있으실까요?
저는 사실 별로 없습니다. 과거의 제 삶에 후회도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결국 이 삶은 제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스스로의 책임으로 감내하고 있으니 어떤 삶으로 가도 저의 내면은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늘은 여섯 살 어린이 세 명이 타요버스를 타고 제 주변에 뒹굴어 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긴 얘기를 쓸 수가 없네요. 다만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BGM으로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이 편지를 마칠게요.
담화님의 오늘의 선택이 내일도 아름답게 반짝이길 바라면서.
열두 번째 답장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