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화 Feb 08. 2024

버저비터: 끝은 아무도 모른다구!

《연월일》

담화님

안녕~ 잘 지내고 계시온지요?

입춘이 하루 지났다고 오늘은 낮기온이 영상 8도입니다. 눈구름이 왔다가 비가 되고 말았네요.


담화님 말대로 ‘어떤 문장으로 남고 싶은가를 한 번쯤 숙고하며 남의 삶의 방향키를 잡아보는 것’ 좋은 것 같습니다. 어.. 우리 '읽고 쓰는 할머니로 늙어가기'로 했지요? 좋습니다. 가끔 키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매번 다잡게 되는군요.




기억에 남는 도서관이라... 저 역시 동네 도서관을 가장 많이 애용합니다만, 대학도서관이 추억의 장소 중 하나입니다. 특히나 저는 토요일 오후에 화장 곱게 하고 도서관 가는 걸 좋아했습니다. 원래 대학생 때는 토요일 오후에 화장하면 소개팅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는데, 뭐 저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을 했던 거겠죠.

아시다시피 토요일 오후의 대학 교정은 적막강산이죠. 특히나 사람 그림자 하나 찾기도 힘들었던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 꺼내어 실컷 읽고, 서가를 거닐며 이런저런 책들을 꺼내보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제 청춘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졸업할 때 제가 가지고 있는 책, 물려받은 비싼 전문 도서들을 많이 기증하고 나온 것을 뿌듯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은 아니지만, 좋아했던 곳이 있었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홍대 골목에 디자인&미술 서적을 전문으로 판매하던 서점이 있었습니다. 다크브라운의 묵직하고 높은 서가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중간의 매대와 서가들은 조금 낮아 어디서나 책에 집중한 다른이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수 있었지요. 조용하게 낮은 재즈음악이 흘러나오고 차분한 커피 냄새가 흘러다니던 그 곳에는 예쁜 디자인 소품도 많고, 디자인, 사진, 미술 분야의 원서며 희귀 서적들도 많아서 무척 흥미로운 곳이었습니다. 언젠가 서점 주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아마 그 곳에서 처음 하게 된 것 같아요.


지적 허영심인지 혹은 그저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즐거움 때문인지, 장소의 특수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책이 있는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이 있어요. 그 때문일까요, 담화님이 소개해주신 책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담화님

요즘 AFC 카타르 아시안컵 보고 계시는지요?

저도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우리나라 경기는 조금이라도 보려고 해요. 얼마 전 난리가 났던 그 호주전을 저는 전반전만 보고 잠들었습니다만, 새벽에 저의 동반자 분께서 대흥분하시어 저를 깨우지 않았겠습니까...

“필화, 우리가 이겼어요!!!” 그리곤

 연장전까지 가서 30초 남겨두고 역전골을 넣었다며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아.. 난 깨달았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읭? 몰랐냐고!’ 새벽에 자는 사람 깨워서 할 말인가 싶어서 “버저비터도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하고 몸을 돌려 다시 잤습니다만, 역시 인생도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겠지요.




여기 정말 불굴의 투지로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고 뿌리를 내린 할아버지 한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언급이 되곤 하는 중국 작가 '옌롄커'의 작품 중 《연월일》의 주인공 셴할아버지입니다.






셴 할아버지가 사는 고산준령에 천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가뭄이 들이닥칩니다. 더위와 가뭄에 지친 골짜기 주민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던 셴 할아버지는 “내 나이 일흔 둘이라 사흘쯤 걷다가 지쳐서 죽을 거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 마을에서 죽고 싶소.”라며 가던 길을 돌아옵니다. 농사 잘 짓기로 유명했던 셴 할아버지는 밭에 겨우 한 그루 초록잎이 조금 남은 옥수수를 잘 살려 키워볼 요량이었지요.


집집마다 남은 식량이 있는지 털어보며 장님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살아가던 셴 할아버지는 남은 식량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가 마을 사람들이 숨겨둔 종자씨들을 캐냅니다. 신나게 그걸 캐내며 더위와 싸우던 할아버지는 굶주린 쥐떼를 상대해야 할 상황을 맞이합니다. 이 녀석들과 머리 싸움을 하며 서로 종자씨를 획득하느라 바쁘게 보내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그마저도 다 사라져 버리고 없다는 사실에 충격받고, 무자비한 햇빛과 더위로 인해 마을의 우물도 싹 다 말라버린 사실에 다시 한 번 무너집니다. 지지 않는 태양을 저주하던 셴 할아버지는 물을 찾으러 떠나지요. 천신만고 끝에 발견한 산골의 작은 샘에서 이번에는 무려 늑대 떼와 조우하게 됩니다. 일흔 두 살의 셴 할아버지는 늑대와 어떻게 싸울까요...




여기까지만 대충 읽어도 셴 할아버지가 자처한 고향에서의 남은 생은 정말 처절하다는 게 느껴지시죠? 그런데 이 처절함에 더욱 몸서리치게 되는 것은 작가 옌롄커의 필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태고 이래 최악의 가뭄이 덮쳤던 그해에는 세월도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손으로 슥 문지르면 세월은 재처럼 손바닥 위 타버린 자리에 들러붙었다. p.14


이 이야기의 첫 두 문장입니다. 이 두 줄을 읽고 저는 ‘아 이 분은 보통이 아니시구나!’라고 생각했더랬죠. 세상에 등장인물이 사람 하나, 눈 먼 개 한 마리 일 뿐인데, 이렇게 스펙터클할 수 있나요. 마치 영화를 보듯 세밀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묘사와 비유와 서사, 이 삼종 필력에 저 혼자 놀라며 떨고, 울고, 웃고, 긴장하고, 감탄하다가 책장을 덮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운 덕에 이어지는 나머지 세 편의 단편(골수, 천궁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펼쳐보지도 못했어요. 필력이라고는 없는 제가 이리 말해봤자 감이 안 오실 테니,  《연월일》일 중 인상깊었던 문장을 좀 가져와 볼게요.



옥수수 줄기는 하루하루 높게 자랐다. 고요한 밤에 옥수수가 생장하는 소리는 가늘고 파릇파릇했다. 깊이 잠든 아기의 숨소리 같았다. 그럴 때면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옥수수 줄기 옆에 앉아 하루 종일 땅을 파느라 지친 몸을 쉬면서 옥수수의 호흡에 귀를 기울였다. 온몸의 뼈마디가 싸하게 아리면서도 시원한 쾌감이 느껴졌다. 달님도 나왔다. 여인의 얼굴처럼 둥근 달이 드높은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별들도 달 주위에서 빛을 발했다. 설날에 새로 지어 입은 옷의 단추가 더없이 넓고 파란 비단에 매듭을 만든 것 같았다. p.37


셴 할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갑자기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채찍을 집어들고는 길 한가운데서 서서 해를 향해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늘고 질긴 소가죽 채찍이 허공에서 뱀처럼 구부러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더니 채찍 끝이 파랗고 하얀 소리를 내면서 벼락이 되어 햇빛 전체를 후려쳤다. 햇빛이 배꽃처럼 부서져 흩날리면서 땅바닥에 가득 빛의 조각이 화려하게 흩어졌다. 설을 보낼 때처럼 벤파오 소리가 마을 전체에 가득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중략)

“장님아, 두려워하지 말거라. 앞으로 내게 먹을 게 한 그릇 있으면 네게도 반 그릇이 있을 게다. 내가 굶어 죽는 일은 있어도 네가 굶어 죽는 일은 없을 게야.” p.48




이 아름다운 문장들, 복선인지도 모르게 깔고 가는 문장들을 보면 왜 이 분이 출판, 광고, 게재, 비평, 각색을 금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항상 오르는지 이해가 갑니다.

옌롄커는 중국작가협회 소속 1급 작가임에도(한 마디로 정부의 녹을 받는 분) 당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쓰시기도 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2022년 한국에서 동일 제목으로 상영된 영화의 원작자)처럼 당에서 좋아하지 않을 글을 쓰기도 하셨지요.

무엇보다도 작가란 무엇과 싸우고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신념과 사상, 그에 못지않은 필력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2014년에는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을, 2022년에는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셨지요. (네, 저 단번에 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나저나, 척박한 고산에서 해와 싸우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옥수수를 키워내던 셴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시지요? 결말은 이 문장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눈꺼풀에서 불에 덴 것 같기도 하고 바늘로 찌르는 것 같기도 한 통증이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일어나 앉아 눈을 비볐다. 여전히 하늘 한가운데 황금빛 동그라미가 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조상 8대까지 욕을 퍼붓고 나서 말했다.


“언젠가 해에 굴복하지 않은 내 무덤을 보게 될 게야.” p.32



생의 여정은 구비구비 악전고투로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지요.그리고 그 끝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담화님

우리 이 생을 잘 살아봅시다.

우리가 버저비터를 날릴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직 끝나지는 않았으니까요.


이야기로 차곡차곡 생을 쌓아가는 담화님

지난 주에 무슨 책 읽으셨어요?

이전 13화 도서관, 너는 누구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