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버킷리스트를 위해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에서 옛날 교복을 대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갔다 왔어요. 특이하게도 전시관 안에 위치한 대여점은 사설 업체가 운영하고 있더라고요. 에세이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에서도 다뤘지만 아빠의 버킷리스트는 '교복 입어보기'였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부터 벌어야 했던 아빠는 늘 교복 입은 또래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하셨지요.
한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전시관은 열려있는데 대여점 사장님이 출근을 안 하셨더라고요. 플랜 B로 알아둔 교복 대여 가능한 사진관도 하필 그날이 비정기 휴무일이었습니다. 아빠는 괜찮다고, 그냥 마실 왔다 생각하고 구경이나 하자고 했지만, 솔직한 그는 표정 숨기는 법을 몰랐지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대여점 사장님과 통화하며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다행히 대여점은 항시 오픈되어 있어 교복을 자유롭게 골라 입을 수 있다네요. 대여비만 계좌 이체로 보내면 된다고 해서 가까스로 교복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1시간 대여에 12,000원. 교복은 물론 액세서리(완장, 가방, 모자)도 함께 착장 할 수 있었어요. 대여점 구석에 있던 행거에서 부모님 사이즈에 맞는 교복을 살펴보는데…… 아뿔싸. 제대로 세탁된 옷이 별로 없더라고요. 소매와 어깨엔 뿌연 먼지가 그득했습니다. 카라엔 간간이 누런 때도 묻어 있었고요. 요즘 같은 시국에 위생 관리는 철저하겠지 하며 달려온 건데 괜히 죄송해서 얼굴이 다 화끈거렸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달랐어요. 그깟 먼지가 대수냐며 화끈하게 옷을 탈탈 털었고 완장을 찾기 바빴습니다. 완장은 '반장'과 '선도' 두 종류였는데 아빠는 고민도 없이 '선도'를 잽싸게 낚아챘죠. 엄마는 "반장 안 해봤는데 여기서나 해 보자"라며 '반장'이 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순식간에 엘리트 학생으로 레벨 업!
전시관 내부에 7080년대 골목을 재현한 공간이 있어요. 가정집 거실 안에서, 오락실 앞에서, 문방구 앞에서, 자전거와 연탄이 놓인 골목길 앞에서 커플샷에 이어 아빠 단독샷을 촬영했습니다. 60년 만에 입어 본 아빠의 처음이자 마지막 교복. 입학생이자 재학생이자 졸업생이 되었던 단 1시간. 전 이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연사로 쉴 틈 없이 찍고 있었습니다. 그때, 핸드폰 액정에 아빠의 미묘한 표정 변화가 초 단위로 기록되기 시작했어요. 설마, 하고 액정 밖 아빠를 바라보니 홱 뒤돌아서더군요. 먼지 쌓인 그의 어깨가 힘없이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무던한 엄마는 "여기까지 와서 왜 우냐"며 구시렁대었고 눈물 많은 부녀는 멀찍이 떨어져 훌쩍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빠는 내내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어요. 왠지 12,000원짜리 교복으로 고맙다는 소리를 듣는 게 멋쩍었지만 이마저도 그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아빠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거든요. 교복을 빼입은 그의 전신사진으로. 나는, 이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아빠와 달리 엄마는 교복 체험에 다소 시큰둥했는데 아무래도 학창 시절에 입어봤기 때문일까 싶었어요. 그러다가 혹시 엄마도 버킷리스트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여쭤보니 "리마인든지 저마인든지 웨딩드레스 입고 싶다" 하시네요. 교복이 싫은 게 아니라 드레스가 입고 싶었던 것뿐이었어요. 더 늙고 주름지기 전에 가장 젊은 날의 당신을 기록하고 싶다는 어무니. 쪼매만 기다리쇼잉. 다음엔 드레스 투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