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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n 12. 2024

누군가의 반려견이 공포가 된다면

반려동물 인구수가 전체 인구의 30%인 1500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하니 3-4명 중 한 명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셈이다. 사실 이런 통계가 아니라도 길을 나서면 마주치는 반려동물, 그중에서도 반려견을 떠올리면 그 숫자가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의 하소연이 1500만 반려인들에게 비난을 받을까 걱정부터 앞선다. 또한 같은 이유로 이런 생각을 말하는 것을 주변에서 적극 만류했던 것도 사실이다. 요즘 시대에 반려견에 대한 것은 금단의 영역이라나.


반려견이 많아지고 길거리에서 깜짝 놀라는 횟수도 많아졌다.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와 바지춤에 혀를 날름거리며 서 있거나 다리를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앞에서 다가오는 반려견을 신경 써서 피했다 싶다가도 뒤에서도 다가오는 반려견을 피할 공간을 미처 확보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멈춰서는 경우도 많다. 개 대한 나의 경기를 아는 가족들은 반려견이 다가오면 미리 경고해 주고 위치를 자연스럽게 바꿔 주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사실 모든 개가 무섭고 흉측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선이 절로 갈 정도로 예뻐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나 보는 것과는 별개로 접촉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온몸에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이건 내가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증상이 아니다. 크기가 작고 생김새가 귀엽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조건반사처럼 가까이 스치기만 해도 달려들거나 물릴 수 있다는 공포가 마음을 지배한다. 특히 잘 짖고 이빨을 잘 드러내는 개는 무조건이다. 강아지의 이빨은 내게는 늑대나 악어의 이빨과 다르지 않다.


갑자기 반려견과 접촉하면 짧은 비명도 터져 나온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과 동시에 다리는 얼어붙는다. 자신의 애견 때문에 놀랐다는 사실에 대부분은 목줄을 당겨 반려견을 단속하며 미안해한다. 적어도 미안해하는 표정이라도 짓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늘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우리 아기가 더 놀랐잖아요!" 하며 나를 향해 쏘아붙이거나, "우리 애는 물지 않아요."라고 나의 불안을 지나친 반응으로 치부한다. 나아가 "괜찮아~ 놀랐지?" 자신의 반려견을 향해 따뜻한 말을 건네며 아랑곳없이 가던 길을 재촉하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도 강아지와 좋았던 시간이 있었다. 멀게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 강아지를 끼고 잠에 들었던 희미한 기억도 있고 가까이는 10년 전쯤 지인의 부탁으로 남편이 데리고 온 강아지를 일주일간 집에서 돌보기도 했었다. 물론 밥을 주고 산책을 시키는 것은 주로 남편과 아이들이 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강아지를 진짜 좋아했던 것 같다. 집을 나간 강아지를 찾겠다고 부모님을 졸라 여러 날을 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10년 전 일주일의 돌봄은 시원섭섭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없어도 된다는 것과 어설픈 돌봄에 대해 마음의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시가 나더라는 정도의 아쉬움이었다.


개를 대하는 병적인 태도는 개에게 심하게 물렸던 경험 때문이다. 당시는 진돗개 믹스견 종류였던 것 같다. 순혈에 대한 관심보다는 집 앞마당에 개 한 마리 풀어놓고 방범을 책임지게 하던 시절, 어느 집 개가 집을 뛰쳐나와 동네를 휘젓고 다니다 주춤하는 내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배가 고팠는지, 원래 사나운 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팔을 심하게 물렸고 지금도 그 상처가 있다. 병원으로 실려가 처치하고 후에 들은 이야기는 그 개를 처분했다는 소식이었다. 광견병에 걸렸다나 뭐라나.


두 번째 경험도 비슷하다. 20대 중반, 퇴근길, 아직은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시간,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큰 개가 갑자기 달려와 물었던 경험. 어릴 때의 기억 때문에 개에 대한 공포가 있었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 개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고 가방으로 막았지만 물렸고, 온몸이 공포에 휩싸였던 기억은 지금도 비교적 선명하다.


물론 요즘의 반려견은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 나름의 훈련도 시킨 것 같고 먹이도 충분히 주기 때문에 굶주림과는 거리가 멀 것이고, 게다가 늘 주인이 옆에 있다.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는 반려견일지라도 목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행동반경을 예측해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면 예전처럼 무작정 피해를 입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집을 나서면 도처에서 반려견과 마주친다. 때로는 양쪽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두 개가 만나는 광경을 주인들은 멀찍이에서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는 일도 많다. 문제는 내가 흐뭇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지만 거리의 중심은 개가 차지하고 있다. 도로 폭이 5-7미터, 개 목줄을 2미터로 잡아도 4미터는 개가 차지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요즘 목줄은 늘어난다. 내가 피해서 지나갈 여유가 없다.


사실 예뻐하지는 못해도 대범하게 지나치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울 때가 있다. 또 반려견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사랑의 정도가 가족 이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개와 사람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느끼는 부담이 기본적인 예의나 배려의 문제라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하튼 현재의 상황은 나는 개의 크기나 종에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서든 공포를 느낀다. 어지간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짖어대면 깜짝 놀라 되지도 않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멀찍이 도망친다. 앞에서 목줄을 매고 다가오는 경우에도 목줄의 반지름을 계산해서 멀찍이 거리를 두고 돌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정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피할 수 있는 거리에서 반려견이 지나가기를 충분히 기다린다.


최근에는 아파트에서도 대형견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대형견이 튀어나오며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물기도 하고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도 보도된 적이 있다. 이로 인한 민·형사상 법적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반려견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하면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반려견 관련 개입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유럽에 여행을 간 적이 몇 번 있다. 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의 옆에 반려견이 앉아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거리를 걸으며 지나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반려견은 목줄을 하지 않았어도 주인 옆에 조금의 틈도 없이 딱 붙어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지도 고개를 흔들지도 않았고 이빨을 드러내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무서웠지만 가족을 방패로 무사히 다닐 수 있었고 개에 대한 공포감을 조금은 덜었던 것 같다.


반면 우리나라,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작은 반려견임에도 오히려 공포를 느낄 때가 많다. 좌우로 가리지 않고 휘젓는 개와 그걸 방치하는 주인, 죽죽 늘어나는 목줄은 형식적인 장치처럼 보일 때가 많다. 간혹 으르렁거리거나 달려들어도 우리 개는 물지 않는다는 편안한 말만 돌아온다.


반려동물등록제 등 반려견과 관련된 법령과 조례 등이 제정 혹은 개정돼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은 여러 제도와 법령을 알아야 할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반려견이 많아져 기존의 반려견 정책에 많은 변화가 생겼고 정책을 변경하자는 주장도 많아졌다고 들었다. 정책적인 면에서의 뒷받침도 필요하겠지만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의 인식이,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70%의 인구를 위해 생각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반려가 다른 이에게 공포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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