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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n 20. 2024

오래된 사진으로부터 꺼낸 기억

형제애, 그 끈끈한 결속과 단단한 연대에 대하여

3며칠 전에 오래된 가족사진을 보게 됐다. 다섯의 딸이 비스듬히 서서 찍은 사진. 모아 놓으니 비슷한 얼굴들, 강력한 유전자의 힘을 새삼 확인했던 순간이었다. 네 언니는 모두 한복을 맞춰 입고 있었다. 나만 홀로 재킷에 스커트 차림, 나만 왜 한복을 입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회갑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사는 부모님의 사진과 가족사진, 회갑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사진을 차례로 찍었다. 그러다 더 찍을 거 없냐는 사진기사의 말에 큰언니의 주도로 딸들만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 한 장이 뭐 별 건가 싶겠지만, 회갑 사진 기본 촬영에 추가해야 하는 것이어서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그때 큰언니는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냐며 어색한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사진을 몇 장 인화했는지 누가 간직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40년 만에 본 사진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앨범에 남아있던 사진을 셋째 언니가 챙긴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단톡방을 통해 내게 전해진 것이었다. 역사가 문명을 통해 공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딸들끼리 기념으로 사진 한 번 찍자!"


40년 만에 사진을 보며 앞장서 사진을 찍자고 했던 언니의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언니가 없었으면 이 사진도 없었을 테니까. 그날의 상황이나 분위기도 조금씩 기억났다. 회갑 상을 앞에 두고 앉은 부모님께 큰언니 내외부터 차례로 부모님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절을 했다. 어렵게 연 잔치였지만 부모님께서는 고운 한복을 입으셨고 자식들이 모두 모인 그 자리를 흡족해하셨다. 연회의 마지막은 춤과 노래로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일흔여덟에 돌아가셨다. 입 안의 이물감으로 입을 오물거리니 이가 우수수 빠져버리는 희한하고 당황스러운 꿈을 꾸고 난 며칠 후였다. 아버지 환갑 때 찍은 사진이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사진을 찍을 일도 없었고 요즘처럼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하지도 못한 상태였고 노환에 암 진단까지 받은 아버지는 그렇게 떠나셨다.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20년을 홀로 사셨다. 처음엔 힘들어하셨고 조금 지나서는 자식들 집을 왕래하시며 혼자인 삶을 견디셨던 것 같다. 그런 엄마도 생애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의 병원에서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아프다. 열흘 정도 혼수상태에 있다가 떠난 어머니의 영정 사진은 내 결혼식에서 찍은 사진이 쓰였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7남매가 남겨졌다. 부모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둥지를 잃는 것인지 정말 뒤늦게 깨달았다. 특히 막내였던 내게는 가장 포근하고 안락했던 둥지를 잃은 느낌이었다. 홀로 남겨진 느낌. 어느 곳도 기댈 곳 없이 완전히 혼자가 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텅 빈 느낌을 채워주는 것이 형제들과의 만남이었다. 드문드문 시간 맞는 형제끼리 만남을 가졌다. 일곱 남매가 남겨졌지만, 상실의 크기는 저마다 달랐던 것 같다. 더 크게 상실감을 느끼는 쪽이 우물을 팠다. 만남을 주선했고 연락을 하고 모임을 주도했다. 꼭 일곱이 모여야 모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가능하면 함께 모이려고 애를 썼다. 마치 만나야만 한다는 결심을 모두가 한 듯했다.


일곱 남매가 모이면 어느 곳이든 가득 찼다. 고단했지만 아름다웠던 추억, 살아내느라 고생했던 것에 대한 덕담, 이미 할머니가 된 이들에게 엄마는 삶의 표본이자 모범이었다. 엄마와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더했다. 가족이라서 느낄 수 있는 끈끈한 결속, 그 단단한 연대를 오래 가져가고 싶었다.


내 입장에서는 셋도 좋았고 넷도 상관없었다. 낯설고 생소한 나만 모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같은 형제여도 20년 가까운 시차는 너무도 다른 삶을 의미했다. 책에서만 보던 세상을 회한 어린 표정으로 하는 그들의 말에서 드라마의 배경이 겹쳐졌다.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들의 말에 빠져들었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나를 찾는 재미도 있었다.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지. 몇 살이었고 어떻게 했어. 형제들의 말을 토대로 나는 나의 역사를 재구성하기에 바빴다.


일곱이 모두 모이는 것은 3년 만에 끝났다. 오빠가 병을 얻어 바로 부모님 곁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벽해 보였는데, 하나가 빠진 여섯이라는 숫자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완전체를 의미하지도 않았고 완벽한 결속을 의미하지도 못했다. 그저 남겨진 숫자에 불과했다.


형제의 모임도 꼭 여섯이 아니어도 좋았다. 둘도, 셋도, 넷도 빈자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나, 둘이 비어있다는 아쉬움이 주가 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단출하고 더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어서 괜찮다 싶었다. 시대적 배경은 어느새 지금과 여기, 우리가 사는 시대로 넘어왔다. 더는 내가 모르는 옛날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젠 같이 늙어간다는 동질감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얘기할 수 있었다. 노년의 한 때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모임의 화두가 되었다.

 



형제자매관계는 수평적인 요건과 수직적인 요건이 합쳐진 인간관계라고 말한다. 나이 차이가 다양하지만, 출생순서에 따라 위계가 구분되는 수직적인 관계의 틀에 약간의 불평등한 역할이 형성되는 위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수평적 요소도 존재하는데, 함께 성장하고 함께 늙어가며 부모와의 관계에서 평등한 입장에 놓여있는 동료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부모님이 떠났고 큰오빠도 떠났다. 남은 형제들도 언젠가 떠나게 될 것이다. 숙명인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만남을 통해 남은 시간을 잘 살아내는 지혜를 얻는다. 수평이고 수직이고 위계나 관계의 틀보다는 '너'와 '나'가 되어 만남을 이어간다. 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 주며 각자의 삶에 때로는 용기도 얻고 때로는 위로도 받는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최고의 우군을 형제라는 이름으로 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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