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Aug 07. 2024

지극한 비움을 위해

서점에서 희망하는 도서를 바로 대출받을 수 있는 지역 도서관의 도서 대출 시스템이 있다. 예산 문제로 올해는 작년보다 더 일찍 끝이 났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대출했을 것 같은 도서를 기일이 돼서 반납하게 됐다. 예전에는 특별한 볼 일이 없이도 서점에 가서 서가를 뒤적이며 한참 머물곤 했기에 기왕에 방문한 서점에서 바로 나올 수는 없었다. 요즘 주로 찾는 곳은 글쓰기 관련 코너다. 몇 번의 강의 경험이지만 조금 더 보완해서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구상하는 것이 기존의 책과 어떤 차별성이 있을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책 쓰기 코너는 읽기 관련된 책들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읽기 관련해서는 나이를 앞세운 제목들이 눈에 띄었다. 스물은 주로 시작과 관련된 책들이었다. 막 시작된 첫 직업과 관련해서, 삶과 죽음과 관련해서, 사랑과 관련한 것들이 나이 스물을 정의하는 책들이었다. 서른 관련 도서는 아는 제목이 있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며 출간과 동시에 서른의 나에게 나름의 충격을 주었던 시집 제목이었다. 책장에는 서른에 읽는 손자병법, 서른에 읽는 아들러, 서른 살에게, 잘 지내나요 서른, 서른이 심리학에게 등 서른 잔치에서의 시인의 고민과 다르지 않은 책들이 주를 이루었다.


마흔과 관련된 도서는 특히 많았다. 마흔에 읽는 니체, 마흔에 읽는 쇼팬하우어, 마흔에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마흔이 된 딸에게, 마흔의 고독 등. 생의 성숙기에 접어든 나이 때의 사람들에게 철학과 사상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책들이라고 생각했다.


쉰 살은 우아, 여유, 새로운 시작, 퇴직, 도전,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 인생관 등과 관련된 사유가 많았다. 나이 관련 도서는 아쉽게도 쉰이 끝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예순, 일흔, 여든의 무엇도 있겠지만, 또한 그들의 사유나 삶도 가볍지 않겠지만, 독자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것인지 시장에서 소외된 것인지 서가에는 보이지 않았다.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만큼은 아니어도 피서 겸해서 간간히 카페에 간다. 카페에 가면 늘 마주치는 사람이 몇 있다. 그중 여든은 족히 넘었을 법한 어르신이 있다. 그분이 카페에 들어면 왠지 신경이 쓰인다. 작은 키에 허리는 꼬부라지고 조심조심 느리게 걷는 걸음은 보기에도 불안해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 시선을 놓을 수가 없다. 카페에 오시면 간단한 디저트와 커피를 시켜 놓고 천천히 드시면서 책을 조용히 읽으며 한두 시간은 족히 보내고 가시는 분이다.


그분을 보며 나의 여든을 생각했다. 1인, 카페, 커피와 디저트, 책 읽기. 요즘 세상에 이상할 것 하나도 없는 단어들인데 앞에 여든 살을 붙이면 이상하게 물음표가 붙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거동이 불편한, 허리가 굽은, 잘 걷지 못하는' 등을 덧붙이면 왠지 카페라 늘 장소와 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를 자리로 가져가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그분 움직임 불안했다.


가끔은 내 나이에도 카페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이유로 목적이 없이 '그냥'은 카페에 가지 않는다. 카페에 온 목적만 생각하자고 다른 생각을 지우지만, 몰입에서 벗어나는 순간 현타가 온다. 공간은 갑자기 낯설고 이질적으로 바뀌고 어색함이 온몸을 감싼다. 느긋하고 쾌적하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 것인데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자기 검열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나이는 사람을 자꾸 작아지게 만든다.




며칠 전 노자의 도덕경 몇 구절을 읽었다.


치허극(致虛極) 수정독(守靜篤)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하고 돈독함을 지킬 수 있다.


만물은 무성함을 지나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시작점,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고요함이며 천명을 따르는 것이라고 노자는 말한다(?). 요즘의 인간 수명으로 말하면, 근원으로 돌아가는 시점은 여든, 아흔 쯤이 될까. 그 쯤이 노자가 말한 지극한 비움이 완성되는 때일까. 노자의 말은 생이 무르익어 성성한 때로부터 최후의 비움을 위해 차근히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해석되고 있었다.


앞서 얘기한 서점에서 보았던 책 이야기로 돌아가면 노자에 관한 책도 있었다. 바로 오십이 노자를 읽을 때라고. 지극한 비움과 근원을 향하는 고요함, 천명의 순응을 위한 마음의 정리를 오십에 생각해야 했다는 사실에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책에 대한 사유를 풀어낸 사람의 생각이 정확하겠지만, 나는 서른도 놓쳤고 마흔도 깊이 사고하지 못했으며 쉰도 나와 미래를 돌아보지 못했다는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노년은 대개 병이 든 육신과 동의어로 다가온다.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 이러한 생각은 부자유한 육신에 갇힌 비움이 당사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연결되고는 한다. 그럼에도 오십에, 육십에 비움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은 막연하게나마 부정할 수는 없다.




동네 입구에 노인들의 사랑방이 있다. 벤치 4개가 나란히 모여 있는 단지 입구가 그곳이고, 그곳에서 조금 더 깊숙이 아파트 후문으로 들어오면 조촐한 정자가 놓인 곳이 또 다른 사랑방이다. 무더위에도 그늘이 지고 바람이 잘 통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서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한 곳에 많게는 열 명 이상의 노인들이 모여든다.


일부러 들으려고 귀 기울인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들리는 소리들이 많다. 40*호의 그 할머니는 아들과 둘이서만 쓸쓸하게 산단다. 아들의 여자는 집을 나갔고 아들이 할머니를 부양하는 것도 할머니가 아들을 건사하는 것도 아니게 그 집이 그렇다며 혀를 끌끌 찬다. 9*9동에 사는 노인네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단다. 궁금하다는 건지 걱정한다는 건지 알 듯 모를 듯 묘한 뉘앙스다. 마무리는 당신의 조카딸이 용돈을 두둑이 보내왔다는 말과 엊그제 다녀간 딸이 주고 간 다이아 목걸이 자랑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리에 없는 노인들의 불우한 사연 뒤로 자기 자랑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이곳 이야기의 공식인듯하다.


카페에서 마주한 어르신과 동네 사랑방의 어르신들을 나란히 떠올린다. 그들의 비움은 성공적일까? 지극한 비움 끝에 돈독함을 이루었을까? 나는 혼자가 편한 사람이지만 카페의 어르신처럼은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다.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도 없지만 혹여 기회가 있더라도 남의 불행 끝에 자랑을 입에 올리는 것은 나는 절대 못할 것 같다.


마흔에 니체를 만나지 못했고 쉰에 노자를 탐구하지 못했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무성하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푸르기는 했던 삶이었다. 그리고 현재와 이후를 고민하고 있다. 여든이나 아흔에 얼마나 지극한 비움을 이룰 수 있을까. 비록 병든 육신일지라도 그때의 내가 정신만은 돈독하게, 도탑고 신실하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비우지 못한 마음으로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있더라도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지지해 준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