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耳順)은 분노다
아침에 책을 소개하는 방송에서 가난에 대한 책을 소개했다. 책을 소개하는 에디터는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방식이나 솜씨가 훌륭하다고 하며 책 읽기를 권했는데 방송의 진행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에디터의 책 소개에 공감하지 못했다.
이유인 즉, 가난이, 가난에 대한 얘기가, 가난한 삶이 사람들이 궁금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책을 소개하고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면 재미있어야 하는데, 빈곤이나 궁핍, 결핍 같은 이야기들을 과연 사람들이 선택하고 공감할까. 아니라는 것이었다. 책을 많이 팔고 싶다면 차라리 저자가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며 저자가 나올 수 있게 하기를 권유했다.
'책이 끝나도 저자의 가난은 끝나지 않으며, 설령 언젠가 저자의 가난이 과거형이 되더라도 우리 사회의 가난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가난에 대한 현재 진행형의 관심을 촉구한다'는 책소개는, 진행자의 말대로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고 끝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가난을, 저자의 26년간의 가난한 삶을, 앞으로도 가난과 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누가 반길 수 있단 말인가. 방송 사회자의 말에 일부 공감했다.
에디터의 추천 이유는 가난에 대한 저자의 솔직하고 담백한 사연에 가난이라는 인식과 사람들의 시선을 살펴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나아가 가난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이며, 나아가 국가 시스템이 가난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와 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저자의 말을 빌려 알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저자의 책을 소리로 바꾼다면 아마도 유치환의 시 <깃발>에 적힌 '소리 없는 아우성' 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과 들어도 말 못 하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며 '입틀막'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누군가가 가난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그것에 동조하지 못하도록 '입틀막'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 며칠 '법카'로 세상이 시끄럽다. 한 달 사용한도를 훌쩍 넘었다는 장관급 지명자의 법카의 사용액은 고급호텔과 식당, 빵집과 와인, 카페를 가리지 않고 긁어 3년간 1억 4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가난한 청년이 선별 복지를 신청하기 위해 쉴 새 없는 아르바이트 시간을 쪼개 동사무소를 다니며 공무원과 씨름할 때, 부유한 누군가는 퇴직하는 그날까지 법카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다녔단다. 일단 주어진 카드는 논쟁이 필요 없다. 권리가 주어졌으니 절차나 시스템은 내 수중에 들어와 있다는 논리다.
나이 육십, 이순(耳順)은커녕 쓸데없이 소리에 예민하다. 모든 말들이 순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면의 의도와 교활한 속임, 뻔뻔한 논리가 귀를 시끄럽게 하고 거부하게 한다. 공자에게 이순(耳順)은 천지만물에 대한 통찰과 이해였다는데, 나에게 이순은 혼란이며 혼동이며 소리 없는 분노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세상이니 이해되지 않는 모든 소리에 차라리 귀를 닫아야 할까. 강제 '입틀막'에는 자발적 '귀틀막'으로 대응해야 숨이 좀 쉬어 질라나.
<일인칭 가난>, 안온
* 일인칭 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