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아, 덤벼라
부부의 대화는 어이없이 통하는 것이 매력이다. TV를 보다가 어떤 장면이 나오면 연상되는 장소를 떠올리며,
"우리 그때 갔었던..."
거기까지만 말하고, 또 거기에
"그래 거기서 배 탔었지"
하고 다 알아듣는다.
그래서 그런가? 부부의 대화는 점점 더 어눌해지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저....."
하고 남편이 말을 꺼내곤 버퍼링 중이면, 나는
"이거?"
"저거?"
"조거?"
"아님 요런 거?"
하고 스무고개를 하며 맞히곤 한다. 그러다 답답해서
"뭐라고 그러는 거야?"
하면 오히려 기다려 보라고 성을 낸다. '대화의 오작동' 중이다. 그런데 대화의 강자가 나타났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차를 타고 여행을 갈 때면 음악을 틀고 난리를 치며 가는 내내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어떤 때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되지도 않는 유명 연예인들의 성대모사를 하며 맞추기 게임도 했다. 하나도 안 비슷해도 그 사람이 자주 흉내 내는 사람과 같이 시청했던 프로그램의 정보를 떠올리면 그걸 또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도 안 비슷하게 성대모사를 한 사람도, 그것을 맞춘 사람도, 또 그걸 맞췄다고 어이없어하는 사람도 다 같이 웃었었다.
요즘은 둘이서 다닌다. 젊어서 기타를 뚱땅거리던 남편은 다시 취미로 기타를 배우며 치고 있다. 그리고는 거기서 배운 노래들을 핸드폰으로 틀고 외우며 간다. 도무지 외워지지가 않는다고... 나도 덩달아 외우며, 핸드폰을 끄고 서로의 기억력을 테스트해 본다. 어쩌다 몇 마디 틀리고 다 외우면 우리는 감탄에 감탄을 한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이번에는 남편 핸드폰으로 티맵을 켜고 춘천을 가고 있었는데, 티맵 안의 '누구'라는 프로그램의 '아리'를 불러서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그냥
"아리야, 노래 들려줘."
하면, 그즈음에 유행하는 노래들을 랜덤으로 1분씩만 돌려가며 들려주었다. 그것도 재미있었다. 이번엔 남편이 기타를 치는 곡,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들려줘."
했더니 그 곡을 불렀던 모든 가수들을 총망라해서 1분씩 들려주는 것이었다. 졸지에 차 안은 '복면가왕' 프로그램이 됐다. '이 사람은 이문세다.', '아니다.', '저 사람은 정인이다.',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정말 많은 가수들의 노래가 돌려 가며 나오다 이번엔 심지어 연주곡으로 만도 여러 개가 나왔다. 남편은 '요거 재밌네.' 하며 다른 곡들도 해 보았다. 감탄한 남편은
"이건 '복면가왕'이 아니라 '복면 과학'"
인데 하며 이 시스템을 칭찬하였다.
이것저것 하다가 내 신청곡을 주문했다.
"아리야!"
" * 네."
"<별 보러 가자> 들려줘"
말이 길어서 그런지 몇 번을 다시 말해도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살짝 '자기 핸드폰 주인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얘가 일부러 모른 척 하나?'라는 의심도 했다. 다시, 다시 하다가 남편이 대신 큰 소리로
"<별 보러 가자>"
했더니, 아리는,
" * 지금 이렇게 함께 하고 있잖아요."
한다. 헉!
언젠가는 남편이 티맵을 틀고
"## 주소를 찾아줘."
하고 말했는데, 아리는
" * 좀 더 친절하게 말해주세요."
라고 대답했다. 그때 우리 가족이 다 타고 있었는데 모두 같이 폭소를 터트렸다. 우리는 평소에 남편이 별로 친절하게 사근사근 얘기하지 않는다고 놀리곤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때다' 하고 컴퓨터 프로그램도 당신이 안 친절한 걸 안다고 '왜 소리를 지르냐고' 쌤통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아리에게 부탁한다.
"<광화문 연가> 들려줘."
핸드폰 화면엔 <광화문 연과>가 찍혀 있었다. 나는 다시
"<고해>"
했는데, 화면엔 <오해>가 찍혔다. 다시 한번 반복했는데도 이번엔
" * 원하시는 장소를 찾지 못했어요."
한다.
남편은
"얘 이런 거 못해!"
하니 아리는,
" * 제가 처리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한다. '어, 방어도 잘하는데!'
우리는 명령을 내릴 때마다 '아리야!'를 계속 외쳐야 했는데, 보통의 억양이거나, 큰 목소리나, 화난 목소리라도 아리는 늘 언제나 친절한 목소리로
" * 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여러 번 말해서 짜증 나는 남편을 살살 달래는 억양으로
" * 네에~."
하는 듯이 들렸다. 진짜 그렇게 억양을 했나? 어떤 말을 해도 아리는 끝까지 곱게
" * 네에~."
" * 제가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했어요."
한다. 참 성품이 고운 녀석이다.
그런 아리에게 장난기가 발동한 남편이 말한다.
"너 바보구나."
" *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아니 너 바보라고."
그리고는 'NUGU 서비스와의 연결이 원활하지 못합니다.'라는 문장이 나오고 그 후로 아리는 대답이 없었다. 고층 빌딩 사이로 GPS가 잘 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남편이 말했지만, 나는 살짝 의심하였다. '얘가 곤란하니까 연결이 안 된 척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남편은 다시 집요하게 말한다.
"너 바보라고."
" * 제가 허당 같아 보이시군요."
"응, 너 바보야."
" * 제 숨겨진 예능감이랍니다."
"너는 바보다."
" *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 앞에서 바보처럼 굴겠어요."
허, 이런 멘트 보소!
계속된 바보라는 얘기에 아리는
" * 때론 바보처럼 사는 게 좋을 때도 있어요. 하하하."
" * 늘 겸손하라는 뜻으로 생각할게요."
" *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제 백치미를 발견하셨군요."
" * 실망하신 건 아니죠? 하하."
" * 아무도 모르는 제 허당미를 발견하셨군요."
이렇게 억양도 부드럽고 친절하게 매번 다른 멘트로 지루하지 않게 대답해 주고 있었다. 절대로 듣는 사람을 열 받게 하여 화면을 박살 내게 하는 멘트는 없었다.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 드라마 작가들이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았다. 부부간에 이런 '바보'라고 흉보는 대화를 몇 번 반복했다면 언성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웃기다고 계속해보라고 하니, 남편의 다양성도 없는 레퍼토리의 '바보' 공격에,
" * 우리 말고 여기 누가 또 있나요?"
" * 저한테 한 말은 아니죠?"
이제는 현실 부정 내지는 회피를! 마침내는
" * 제가 더 노력할게요."
하는 훌륭한 멘트를 날려서 감동 먹고 그만하기로 했다.
'이런 친구가 있다면.... 이런 배우자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곱긴 고운데...., 티격태격 오고 가는 공격 속에 스릴과 재미가 있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미스터 트롯'에서 진으로 뽑힌 '임영웅'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란 곡을 듣고 있으면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언젠가는 우리 둘 중에도 누군가 먼저 갈 사람이 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가 되면 남은 사람에게 이런 <아리>라는 친구가 말벗이 되어주어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