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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대에 서서

세상아, 덤벼라

by 김희숙 라라조이

꿈 속이다.


- 지난밤 딸이 사 오라던 메뉴가 카톡에 있다. 핸드폰을 눌러 그 카톡 내용을 찾으려 해도 언제나 꿈속에선 그 쉬운 버튼 하나가 죽어라고 눌러지지 않는다. 카운터로 간다. 젊은 직원은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다. 메뉴판을 하나 달라고 했다. 그녀는 메뉴판이 따로 없고 인터넷에서 찾아서 주문해야 한다고 했다. 핸드폰은 작동되지 않았고 노안으로 어떤 것도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우삼겹... 뭐시기'였는데..." 하고 말하자 그녀는 그 종류만으로도 여섯 가지나 된단다. '그중 뭐?'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어버버'하는 나에게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예전 생각이 났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햄버거를 시키러 가면 멕시코나 남미에서 이민 왔거나 또는 불법 체류하던 스패니쉬들이 주문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언제 이 대륙으로 넘어왔는지도 모르는 그들을 우리가 '스패니쉬'라 부르면 그들은 우리를 '치나'라고 불렀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 사람대접받는 걸 싫어했는데 아시아인들을 다 싸잡아서 중국인이라고 불렀다. 사실 우리도 무지해서 그들을 뭉뚱그려 마구 불렀다. 미안하게도. '라티노'라든가 '히스패닉'이라고 불러야 했나 보다.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어설픈 영어 발음으로 주문을 하면 가끔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 같은 의심이 들기도 했다. 미국에서 차별받던 그들이 자신들의 한풀이를 하듯이 아시아인들을 마구 대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그건 자격지심이었을까? 실제로 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는데. 낯선 곳에서 주문할 때의 긴장감 때문에 이렇게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당시 난 햄버거의 이름과 코크를 정말 여러 번 반복해서 외쳐야 했던 적이 많았다.


"햄버얼거, 코크 플리즈, 테잌 아웃!'


1년 반을 휴직하고 돌아온 학교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이란 것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그 전에는 손으로 작업하던 것들이 모두 컴퓨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든 자료는 전체 교육청에서 총괄, 감시할 수 있었다. 그 시스템을 교육청에서는 '나이스'라고 불렀다. 하지만 거부반응을 일으키던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에게 나이스 하지 않았던 그 시스템을 '네이스'라고 부르며 소심한 저항을 했다.


더더욱 연령층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도전이자 시련이었다. 그런데 첫 학교에서 내가 담임을 맡았던 제자가 어느덧 커서 같은 학교 컴퓨터 교사로 부임하여 그 시스템 전체를 총괄하게 되었다. 반가웠던 마음도 잠시 컴퓨터 네이스의 한 단계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넘어가지 않는 그 수많은 순간마다 제자를 찾아가서 가르쳐 달라고 해야 했던 민망함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요새 주민센터에서 어르신들 키오스크(터치스크린 방식의 무인 기기) 교육 프로그램 홍보를 보았다. 아,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는구나. 주문도 능력인가 보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맥도널드나 KFC, 버거킹에서 간식과 커피도 잘 즐긴다. '나 자신 있지. 키오스크 주문!'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 또는 얼리 어댑터들에 대한 열등감을 지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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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사이트 회원가입의 수많은 절차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던 지난날을 이기고 요새는 무엇이든 끈기 있게 끝까지 한다.


"젊다고 다 잘하는 거 아니야. 우리들도 하나하나 다 찾아가며 귀찮은 과정을 참아내서 하는 거야. 해야 하니까."


내 대신 인터넷의 많은 것들을 해 주던 딸이 말하는 걸 듣고 나서부터이다. 스카이스캐너로 항공권 예약도 잘하고, 국내나 해외나 평점이 높고 내 조건에 꼭 맞는 저렴한 숙소도 여러 사이트를 비교해 가며 척척 잘 찾아낸다. 내가 놀러 가야 하니까.


젊은 사람들에 비해 인터넷이나 컴퓨터에 약한 것이 나이 든 사람들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면 나이 든 사람들의 강점이 있을 텐데,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을 인터넷이 알려주는 시대라 나이 든 미덕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참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꿈이 아닌 현실이다. 얼리 어댑터일지도 모르는 젊은이가 서 있는, 요즘 뜨고 있는 샐러드 가게인 '샐러디'다. 카톡으로 딸이 사 달라던 메뉴를 주문대 앞으로 가서 당당하게 외친다.


" 우삼겹 웜 볼에 올리브 추가해 주시고요, 소스는 오리엔탈로 주세요! 테이크 아웃입니다."


내용은 복잡했지만 말로 해서 다행이다.


또 다른 미션이다. 이번엔 'subway'다!


'허니 오트 빵 30cm(한꺼번에 만들고 나중에 반 잘라달라고), 빵 파서, 로스트 치킨, 아메리컨 치즈(토스트), 야채는 피클 빼고 다, 양파 많이, 소스는 홀스래디쉬 많이!'


발견했다. 나이 든 사람의 강점. 무언가에 부닥쳤을 때 못 해도 그냥 뭉개 보는 거다. 지금 젊은이들을 따라간다고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마냥 우물쭈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얼굴에 미소를 장착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보는 거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는 것과 좀 못 해도 괜찮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주문이 빼곡하게 적힌 핸드폰 문자를 주문받는 분이 잘 볼 수 있도록 그의 눈 앞으로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들이밀었다.



추가 달성 미션 : 당근 마켓에서 판 물건을 편의점 반값 택배로 부쳤다. 키오스크로. 무엇이든 처음은 '어버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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