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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좋은 온도

세상아, 덤벼라

by 김희숙 라라조이

"앗, 뜨거!"



40년이 넘은 오래된 아파트 샤워기는 늘 내가 원하는 적당한 온도를 맞추기 힘들었다. 뜨거워서 조금 찬물 쪽으로 샤워기 헤드를 돌리면 너무 차가운 물이 나오고, 또 온수 쪽으로 미세하게 돌리면 뜨겁고 했다. 이쪽저쪽으로 여러 번 맞추려다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한 온도로 샤워를 마치곤 했다.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지나가는 고양이가 반갑다. 귀엽지만 잠시 함께 놀다가 떠나가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거기엔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다. 혹시 배가 고플까 봐 걱정이 되는 고양이한테 나는 밥을 주지 않으니 살짝 미안하기도 하지만 큰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온도도 딱 좋다. 마주치면 좋지만 부담 없이 헤어지는 관계. 대인관계에서도 내 영역으로 갑자기 훅 들어오는 사람도 당황스럽고, 오랜 시간 공유한 사람이 늘 차가움에 가까운 미적지근함을 유지하는 것도 불편하다. 하지만 이 즈음에는 젊을 때와는 달리 대인관계에서도 끈끈한 관계를 많이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뜨거움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남편도 한 때는 뜨거웠겠지. 그러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했다. 푹신한 베개로 잠든 그의 얼굴을 오래 눌러버릴까? 차가움도 불에 덴 듯 뜨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은 지나가는 고양이보다 조금만 더 친근한 사이로 산책을 하곤 한다. 딱 좋은 온도로.



요즘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면 밤을 지나치기도 하고 신이 나서 그 안에서 막 놀고 싶은 때도 있다. 그러다 나는 적당한 온도를 찾아 멈추고 침대로 간다. 그럴 때 스스로 기특하게 여긴다. 스스로의 열정도 힘들다.



자식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까? 그래야 하겠지. 세상에 대한 헌신 같은 일들도 적절함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



얼마 전 오래된 아파트 배관을 새로 바꾸는 공사를 했다. 늘 샤워기를 적절한 온도로 맞추기 힘들었는데 이젠 쉽다. 그리고 딱 좋은 온도에서 샤워를 하며 편안함을 느낀다.



세상과 나, 이제 편안한 딱 좋은 온도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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