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아, 덤벼라
귀걸이를 임팩트 있게 길게 늘어뜨렸다. 보랏빛이었다. 포르투갈 리스본 언덕 길거리 예술가들의 좌판에서 산 것이었다. 거기에 어제 딸이 골라준 꽃무늬 블라우스에 '레자'라고 불리던 베이지색 인조 가죽 치마를 입고, 갈색 버버리 코트를 걸쳤다. 다리엔 양말? 스타킹?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알 다리로 검은색 힐만 신고 나섰다. 그리곤 입술엔 죽은 장미 빛깔의 검붉은 립스틱을 진하게 눌러 칠했다.
나는 지금 비장하다.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 비싼 여성 옷 브랜드 매장에 전액 환불하러 간다. 두 쇼핑백을 들고.
며칠 전이었다. 신세계 샘소나이트 매장에 아들의 가방 지퍼 수리를 맡기러 갔었다. 한 때는 자주 들러 구경도 하고, 지하 식품 매장에서 물건도 사고 또 먹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발길을 끊고 갈 일이 없어졌다. 지인이 '직장을 그만두면 등산복과 장례식 복장만 갖추면 된다.'라고 했는데 얼추 그 말이 맞게 돌아가고 있다. 나의 주된 일과는 걸어 다니고, 노는 일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지나가다 평소에 비싸다고 인식되었던 브랜드에서 기획상품처럼 세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1년에 한두 번 하는 세일을 내가 본 것이다. 빨간 샤랄라 스커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언니~"하고. 나는 빨간 스커트와 대화를 좀 나누려 fitting room으로 갔다가 더 강렬한 옷을 내 턱 밑에 갖다 대는 매니저의 권유로 그것들을 다 샀다. 비싼 옷을 세일하는데 비쌌다. 순간 머리를 굴려 그동안 백화점 출입이 뜸했던 나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는 질러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난 부자가 된 것 같고 기분이 좋았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는 내 발이 갑자기 0.1g이 된 듯했다.
그리고 어젠 모처럼 딸과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를 휩쓸고 구경하고 다녔다. 나의 전속 코디인 딸이 골라 준 꽃무늬 블라우스는 만원이었다. 구두 속에 신을 스타킹 같은 양말도 한 개에 천 원씩 사고, 버블티도 마셨다. 그러다 한 개에 2천 원 하는 옷집에서 다섯 벌이나 샀다. 계산대에 갔더니 만원에는 여섯 개를 준다고 해서 또 하나를 추가했다. 집에 와서 입어보니 다 쏙 맘에 들었다. 단지 입어보지 못하는 관계로 청바지는 가늠이 안돼 너무 작았다.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해야 한다.
그리곤 그동안 내 방 옷장에 숨겨놨던 비싼 빨간 샤랄라 치마와 임팩트 있는 비싼 옷을 딸 앞에서 입어 보고 평을 기다렸다. 역시 너무 과하다는 평가! 패턴과 색, 특히 2천 원짜리 옷을 몇 백 벌 살 것 같은 가격은 그만한 가치를 하지 못한다는 논의 과정을 거쳐 비싼 옷들 전부를 리턴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걱정이었다. 어릴 때 엄마가 가게에서 사 온 물건을 가서 환불하거나 다른 걸로 바꾸어 오라고 심부름시키면 정말 한참을 고민 고민하고 가게 앞을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그게 왜 그렇게 힘이 들었는지, 가게 주인에게 말을 꺼내기가 왜 그렇게 죽도록 힘이 들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잘 바꿔주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요즘은 그렇지도 않고 백화점 직원은 얼굴색도 불편하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당당하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0.1t이나 되는 듯 무거웠다. 아마도 내가 한 결정에 대한 번복은 내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는 비약을 스스로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차려입은 것은 혹시 '저 거지가 옷을 바꾸러 왔네!' 하는 속엣말이라도 들을까 봐 오버한 거겠지.
늘 옷보다는 더 빛나는 인간이고 싶었다. 내가 입은 옷의 값어치보다도 못한 초라한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입든 그 안의 빛나는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 집중하느라 내가 무엇을 입었는지 상대방이 기억하지도 못하게 멋있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옷보다 나은 인간이 되려면 이천 원짜리 옷을 입어야 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아니면 내 존재의 값어치에 옷값이라도 더해서 가치 업그레이드라도 해야 할까 하고.
오늘, 신세계 백화점 비싼 옷 매장의 리턴 조치는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3분만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비싼 옷과 싼 옷을 넘나드는 나는 평소에 집에서 뭐를 입나? 그냥 옷이다. 속옷을 안 입어도 표시 안나는 헐렁한 티셔츠와, 허리를 갑갑하게 조이지 않는 실내복 바지를 반복해서 입는다. 이럴 거면서 비싼 옷, 싼 옷은 왜 구분하며, 옷은 왜 자꾸만 사는 것인가?
한 친구가 말했다. 옷 가게를 지나갈 때면 경주마들의 눈을 앞으로만 집중하도록 하는 눈 양 옆에 하는 가림판을 우리들에게도 씌워야겠다고. 나는 상상한다. 눈 가림판을 하고 길을 걸으며 어떻게든 가림판 사이 틈새로 가게의 옷들을 재빨리 스캔하는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