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을, 글이 나를 떠나겠다고 소리쳤다.
글이 지겹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책상 앞에 앉아 맥북을 켜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한 줄을 쓰기 위해 한 시간을 버티다가 결국 포기하길 반복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떠났다. 추석 연휴라 티켓 값은 터무니없었지만, 떠나는 것 자체가 나를 구할 유일한 방법처럼 느껴졌다.
비행기는 새벽에 방콕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기내의 불이 꺼지고 승객들이 하나둘 잠들었다. 나만 깨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혼자 깨어 있는 느낌은 묘했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것 같았다. 맥북을 열고 독서등을 켰다. 불 꺼진 공간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김광석의 ‘내사람이여’가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구창모의 ‘희나리’가 뒤따랐다. 음악이 감정을 흔들기 시작했다. 글을 쓰다 말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동안 멈춰 있던 시간들이 떠오르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답답함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모두가 잠든 이코노미석에서 혼자 깨어 글을 쓰고 울고 있던 그 순간. 고독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방콕에 도착한 뒤에는 매일 걸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카페를 찾아 들어가고, 시장도 구경했다. 카페마다 분위기가 달랐다. 어떤 곳은 음악도 없고, 대신 커피를 내리는 소리랑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공기를 채웠다. 현지인들의 언어와 거리의 자동차 소리까지. 그 모든 게 글이 되었다. 그 소리들이 내가 쓰고 싶던 문장을 대신 써주는 것 같았다.
시장도 좋았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웅웅 울리는 그 혼잡함 속에서 이상하게도 평화를 느꼈다. 시장 한복판에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서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음 속에서 마음이 조용히 정리됐다.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고독은 나를 내면으로 데려갔지만, 방콕 거리의 소음은 그 내면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줬다. 고독과 소통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방콕에서의 시간이 끝날 무렵, 깨달았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나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일이었다는 걸.
고독은 나를 분해했고, 소통은 나를 조립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독은 나를 깊게 만들고, 소통은 그 깊이를 세상과 연결해 준다. 둘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길을 잃은 채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글은 내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었다. 글은 나와 세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겨났다. 내가 하는 건 그저 손을 내밀어 받아쓰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글은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