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팝업창이 떴다. 치료를 해 주겠다는 창도 같이 떴다. 다운받지도 않은 프로그램들이 맘대로 남의 컴퓨터에 쳐들어와서 맘대로 고쳐준다고 알지도 못하는 프로그램을 깔아놓기도 했다.
컴퓨터를 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아는 놈이 더 무섭다’며 도대체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컴퓨터가 왜 고장이 나느냐고 따졌다. 고치러 왔던 친구는 ‘네가 정말 무섭다’고 했다. 컴퓨터가 고장 나서가 아니라 바이러스가 프로그램을 망가뜨렸다는 것이었다. 이 바이러스라는 놈 때문에 친구를 사기꾼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세월이 한참 지나도 소멸되지 않는 바이러스도 있다. 남의 컴퓨터에 침입해서 잠복기를 거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침투하자마자 기능을 마비시켜 버리는 바이러스도 있다. 요즘은 몇 번의 검색만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알 수 있지만 찾아서 치료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바이러스도 있다.
내 몸에는 오랫동안 잠복하고 있는 불신 바이러스가 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궁이에 불 지피는 일밖에 할 줄 몰랐던 나. 초등학생이었던 남동생. 술병으로 담을 쌓을 만큼 삶의 방향을 잃고 술과 친하게 지냈던 아버지와 엄마 없는 1년의 시골 생활은 내 기억의 지옥이었다.
언니들의 성화로 시골의 논밭을 팔아 부산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이사하기 전날 밤. 동생과 나는 논밭을 팔아 묶어놓은 돈다발을 방바닥에 풀어놓고 밤새도록 돈을 세고 또 세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큰돈을 만져나 보겠느냐는 어린 마음에서였다. 지긋지긋한 시골 생활을 벗어난다는 설렘과 부산에서 시작할 새 삶을 그리다 보니 쉬이 잠도 들지 않았다.
시골의 논밭을 판 돈으로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부산 변두리에서 슈퍼마켓을 열었다. 동생과 내가 밤새 세었던 돈보다 몇 배 더 부자가 되는 삶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도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어수룩한 시골뜨기가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꾸었던 꿈처럼 도시에서의 삶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라도 주소만 불러주면 외상장부에 이름을 올려 주고 아무런 의심 없이 물건을 내주었다. 그러나 월급날 갚겠다며 차곡차곡 적어두었던 외상값 장부의 이름 주인들은 대부분 월급날이 되어도 찾아오지 않았다.
조카를 업은 큰언니와 외상장부를 들고 골목골목을 다녔다. 시내버스를 타고 직장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몇 번을 미루기는 예사였고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외상을 더 주다 보니 외상값은 더 늘어나는 일이 허다했다. 심지어 언제 주겠노라는 각서까지 쓰고도 갚지 않고 이사를 가 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 바이러스가 내 몸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을 의심부터 하는 바람에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한다. 언젠가 은행에 가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창구까지 들고 가는 나를 본 남편이 ‘그렇게 세상을 믿지 못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은행 문 앞에 다시 돌아가 우산꽂이에 우산을 다시 꽂았다가 3분도 채 못 되어 돌아왔는데, 역시 우산은 내가 꽂아놓은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믿었다가 낭패 본 일을 수없이 겪는 동안 오래 잠복 중인 내 몸속에 바이러스도 여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요즘 도 컴퓨터가 자주 말썽을 부린다. 고장 신고를 받은 통신사 직원이 바이러스 때문에 프로그램이 자꾸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사를 하면서 인터넷 연결을 해준 직원을 또 의심한 것이다.
며칠 전부터 모든 글이 복사가 되지 않는다. 복사키를 누르면 hello!라는 메시지만 뜬다. 게시판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누르다가 시간만 빼앗기고 괜한 글만 몇 개 삭제했다가 뒤늦게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 심각한 건 컴퓨터 속 바이러스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자꾸 게을러지는 바이러스가 내 몸속에 침투한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검색을 해서 벌써 치료를 마쳤거나 유료 치료라도 했을 텐데, 모든 게 귀찮아졌다.
이 심각한 바이러스들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었던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악성 바이러스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자꾸 불신을 복사해내기도 모자라 게으른 바이러스까지 껴안고 살아가는 요즘, 나는 내가 제일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