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때 소망은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보는 거였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까를 생각하며 엄마의 마음 곁을 맴돌았지만, 엄마가 나를 지칭하는 말에는 늘 ‘말띠여서’, ‘할머니를 닮아서’가 붙었다.
성경을 줄줄 읽던 1892년생 할머니는 하얀 쪽머리에 항상 흰옷을 입고, 흰 양말을 신었던 백의민족이었다. 빨래해 온 옷에 조금이라도 얼룩이 있으면 마루에 집어 던지면서 다시 빨아 오라고 할 정도로 유별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할머니의 성경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 방에서 잠이 들었다. 할머니가 읽었던 두꺼운 성경책이 할머니와 함께 관에 들어간 뒤부터, 그 방은 아버지 차지가 되었다. 그때야 나는 엄마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잤다. 엄마에게 할머니처럼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이야기를 지어내다가 어느새 코를 골며 잠으로 빠져들기 일쑤였다.
우리집에는 족보와 함께 한자로 된 책이 대나무상자 가득 있었지만, 어릴 때는 그게 무슨 책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른이 된 나중에야 할아버지가 지은 책이었다는 걸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들었던 것 같다.
오빠가 중학교 다닐 무렵, 누군가 삼국지 한 질을 사줬는데, 나는 1권 첫 부분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읽기를 포기했다. 물려받은 교과서 외에는 책이라고는 참고서도 읽어본 기억이 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언니가 셋이다. 큰언니와는 18살 터울이었다. 큰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이전에 결혼했고, 둘째 언니와 셋째 언니는 부산에서 자취하면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야간학교를 다녔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고생하는 두 언니들을 항상 안타까워했다.
그런 언니들에게 편지를 쓰는 건 내 몫이었다. 길쭉한 형광등 아래 엎드려 나는 엄마가 불러주는 편지를 받아썼다. 돈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엄마는 부모로서 염치없다는 말도 항상 덧붙였다. 편지쓰기 덕분인지 4학년 때부터 담임선생님께 붙들려 2년 동안 동시를 배웠고, 백일장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가을이면 엄마는 밤을 한 톨 한 톨 주워 와 항아리에 넣어놓고 언니들을 기다렸고, 명절이면 선물 보따리를 싸 들고 올 언니들을 기다리며 손을 꼽았다. 아버지가 3대 독자라 친척이 없기도 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머니 덕분인지 때문인지, 제사도 없었고 명절에 집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그날도 나는 언니들에게 보낼 편지를 가지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는 정문과 뒷문이 있었는데, 우리 동네 쪽 아이들은 항상 뒷문을 이용했다. 우체국은 정문 쪽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우체국에 갔다가 집에 가려면 빙 둘러 가야 해서 편지를 부치려면 점심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에 편지를 보내고 돌아오는데 교문 앞에 꽤 많은 아이들이 주임 선생님께 붙잡혀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도 붙잡혔다. 전날 비가 많이 왔는데, 교문 앞 개울에는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교문 밖을 나갔다 온 아이들은 모두 붙잡혀 있는 듯했다.
잡힌 아이들은 다시 교무실 앞 복도에 가서 벌을 섰다. 그런데 교무실 복도에서 벌을 서고 있는 아이들은 교문 앞에 있었던 아이들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나는 주임 선생님께 공정하지 못하다고 따졌다. 그날 내 뺨에는 선생님 손바닥이 벌겋게 찍혔다. 그때까지 나는 단체로 기합받을 때 외에는 벌을 서 본 적도, 선생님께 맞아본 기억도 없었다. 많은 아이들 앞에서 뺨을 맞은 나는 정말 창피했다.
다음 날 오후에는 예방접종이 있었다. 주사 맞기 겁이 나서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를 했다. 평소 키가 작고 몸이 약해서인지 담임선생님은 말없이 조퇴 증을 써 주었다. 집에 가는 길에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친구도 조퇴를 했는지 집으로 가고 있었다. 평소 친하지 않았는데, 방향이 같아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자기 엄마 흉을 보면서 내일 부산에 돈을 벌러 갈 거라고 했다. 다음날이 제헌절(당시 제헌절은 공휴일이었다.)이었고, 방학이 열흘 정도 남아있을 때였다. 방학 때마다 언니 자취방에 놀러 갔지만, 문득 나도 하루빨리 돈을 벌어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언니들처럼 나도 엄마한테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 친구와 아침 일찍 기차를 타기로 했고, 그 친구는 옷 보따리를 챙겨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우리 동네 한 친구도 같이 가자고 하면서 그 친구를 꼬드기자고 했다. 이미 마음이 부산에 가 있었던 나는 그 친구 말대로 우리 동네 친구 집에 갔다. 그 친구는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서도 짐을 싸서 우리 집에서 잠을 잤다.
제헌절 이른 아침, 셋은 보따리를 챙겨 집을 나섰다. 비둘기호 기차는 부산까지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외갓집에는 면에서 몇 대 없는 전화기가 있었다. 언니들은 벌써 내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보따리를 들고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 기막혀했다. 나이가 어려서 공장에 취직이 안 된다고 했다. 다음 날 우리 동네 친구 아버지가 언니 자취방에 찾아왔고, 하루 만에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
벌써 온 동네 소문이 쫙 나 있었다. 월요일 학교에 갔을 때, 교실에 들어오는 과목 선생님마다 가출 언급을 했다. 주임 선생님께 또 불려갔다. 주임 선생님은 내가 전날 맞은 것에 대한 반항으로 친구들까지 꼬드겨 가출한 걸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공납금을 내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공납금으로 가출한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러면서 나를 주동자로 몰았다. 그 친구들은 반으로 돌아가고, 나 혼자 하루 종일 반성문을 쓰고 수없이 맞았다. 선생님은 폭력배나 다름없었다.
뺨이며 종아리에 피멍이 들어 집에 돌아온 나는 엄마한테 학교에 안 다니겠다고 했다. 엄마가 왜 그러느냐고 조용히 물었다. 내 공납금은 항상 고등학생 오빠에게 밀려 제때 낸 적 없긴 했지만, 엄마한테 공납금 이야기를 한 적 없었다. 폭력배 같은 선생님이 끔찍했고,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어색한 시선이 두렵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엉뚱하게 공납금 이야기를 해버렸다.
엄마가 펑펑 울었다. 며칠 있으면 보리 매상을 하는데, 그때 꼭 공납금을 주겠다고, 넌 막내딸이니 언니들처럼 고생하면 안 된다고. 엄마는 일주일 동안 아침마다 학교까지 가방을 들어주며 나를 달래고 달랬다.
방학을 앞둔 토요일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왔을 때, 엄마가 마루에 누워 흰머리를 뽑아 달라 했다. 싫다고 짜증 부리는 나에게 엄마는 두 번 다시 이런 부탁 안 할 테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뽑아 달라 했다. 나는 성질을 부리면서 족집게로 쥐어뜯듯 엄마 흰 머리카락을 뽑고, 교회에 세례 교리 공부를 하러 갔다.
공부가 끝났을 때는 어둑어둑했다. 다음날이 일요일이어서 교회 옆에 살고 있는 같은 반 친구 집에서 자려고 이부자리를 펼 때였다. 옆집 오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가 쓰러졌다고 했다. 밤새 천장만 멍하게 바라보던 엄마는 다음 날 새벽에 돌아가셨다.
염을 하려고 옷장 문을 열었을 때, 내 공납금이 시꺼먼 고무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가족들은 대놓고 나를 탓했다. 나는 엄마를 죽인 죄인이 되었다. 관 속에 누워있는 엄마의 시신을 보았어도, 산에 묻고 돌아와서도, 나는 엄마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말을 안 들어서 일부러 죽은 거라고, 예수님도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데 엄마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거라고, 그깟 일주일 말 좀 안 들었다고 죽어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냐고, 진짜 내 마음도 몰라주고 왜 죽어버렸냐고, 엄마를 원망했다. 한 번만이라도 살아 돌아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랐다.
학교 갔다가 집에 들어설 때면 엄마가 빨래를 널고 있다가 나를 부르며 대문으로 달려 나올 것 같았고, 아침이면 밥상을 차려놓고 나를 깨울 것 같았다. 죽으면 영영 살갗을 만질 수도, 목소리도 들을 수도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편지 한 통으로 꼬여버린 내 청소년기의 소원은 생일에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어보는 거였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엄마 있는 친구들이었다. 언니들은 결혼해서 다른 집 사람이 되었고, 조용필의 노래 ‘꿈’의 가사처럼 화려한 도시를 꿈꾸며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아버지와 오빠, 남동생의 밥상을 책임져야 했다. 자기 한 몸만 알아서 하면 되는 고아가 부러웠다. 언제나 일기장에다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놓고 울었던 청소년기는 더디게 지나갔다. 언젠가 이 일기장을 엄마의 무덤 앞에 펼쳐놓고 엄마에게 긴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엄마에게 꼭 할 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