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도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의심병이 있다.
엄마를 산에 묻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동네 친구 엄마가 찬합값을 받으러 왔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찬합을 샀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찬합을 본 적 없고, 상복을 채 벗기도 전에 빚을 받으러 온 게 야속했지만, 언니들은 말없이 찬합값을 내밀었다. 친구 엄마는 언니들이 도시로 돌아가고 나면 찬합값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언니들과 오빠는 부산으로 돌아가고, 나와 동생 아버지만의 시골살이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늘 술에 절여져 술꾼이 되어 있었다. 그것마저도 나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내 탓이라 여겼다.
밥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내가 밥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학교에 갔다 오면 고추를 따러 가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 옆집 친구들과 아이들을 꼬드겨 힘들게 고추를 따왔지만, 말리지를 못해 썩혀서 버려야 했다. 밭에는 고구마가 널려 있어도 집에까지 들고 오지를 못했다. 엄마가 혼자 가꾸었던 그 많은 논밭의 수확물들은 채 거두지 못한 채 가을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상복을 채 벗기도 전에 찬합값을 받아 간 친구 엄마가 또 찬합값을 받으러 왔다. 지난번에 주지 않았느냐고 해도, 받은 적 없다고 딱 잡아뗐다. 아버지는 그것도 제대로 기억 못 한다고 나에게 술잔을 집어던졌다.
할 수 없이 부산 언니에게 연락해서 언니가 왔지만, 영수증을 받은 것도 아니어서 증명할 길이 없었다. 당시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아줌마는 줄 돈이 없는 것 같다면서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개를 데리고 갔다. 엄마 없는 초등 5학년 동생에게는 유일한 친구고 벗이었던 개였다.
날이 추워져도 아버지는 땔감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학교 갔다 와서 뒷산에 솔가지를 긁어와 겨우 아궁이에 넣는 일밖에 없었다. 언니들이 사 준 1인용 전기장판만으로 겨울을 나야 했다.
웃을 일이 하루도 없는 날들이었다. 언니들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시골의 논밭을 팔자고 했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집이며 논밭을 정리했다.
부산으로 이사하기 전날 밤, 언제 우리가 이런 큰돈을 만져보겠냐면서 동생과 나는 밤새 논밭을 판 돈다발을 세고 세었다.
언니가 다녔던 공장 옆에 조그만 슈퍼를 얻었고, 낮에는 둘째 언니가 갓 낳은 아기를 업고 슈퍼를 지켰고, 밤에는 오빠와 내가 슈퍼를 지켰다. 둘째 언니는 튀김이며 호떡까지 구워 팔았고, 나날이 외상장부에 사람들이 이름이 늘어갔다. 술은 진열할 사이도 없이 거의 아버지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외상값을 받아야 물건을 넣을 수 있을 텐데, 월급날이 지나도 외상값을 갚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중년의 남자가 술을 마시다가 한 잔 정도를 남겨둔 채,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언니와 외상장부를 들고 외상값을 받으러 다녔지만, 날짜를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골의 논밭은 부산 생활 2년도 지나기 전에, 전세금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조용필의 노래 '꿈'의 가사처럼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갔지만, 도시는 춤고도 어두운 곳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병이 생겼다. 엄마의 죽음으로 풍비박산이 되어버린 집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슬픔의 원인은 엄마를 죽음으로 내몬 내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