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결혼밖에 없었다. 아버지 집과 가까운 곳에 신혼방을 마련했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다니면서 전집을 파는 책 외판원이 있었는데, 혼수품으로 세계문학전집 33권과 한국문학전집 33권, 왕비열전 12권을 할부로 들여놓았다. 장식장에 꽂아놓을 전시용 책이었다. 책은 사은품으로 주는 밥상이 갖고 싶어서 덤으로 산 거였다. 그 무렵 남편 친구가 부산에서 작은 서점을 개업했는데,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10권을 결혼 선물로 주었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이틀에 한 번씩 아버지 집에 밥을 하러 다녀오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뜨개질하고,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왕비열전과 한국문학전집, 태백산맥을 읽었고 동네 책 대여점을 드나들었다. 아이를 재워놓고 책을 읽고, 일기 쓰는 시간이 그 무엇보다도 달았다.
둘째를 가졌을 때는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을 읽었다. 당시 『아리랑』은 신문 연재를 했는데, 연재가 끝나면 한 권씩 발간되어 책 대여점에서 빌려 읽을 수 있었다. 빌려온 책을 순식간에 다 읽고 다음 권을 기다리는 시간은, 아슬아슬한 드라마의 다음 회를 기다리는 것보다 길게 느껴졌다.
둘째를 낳기 한 달 전, 남편 친구 부인에게 붓던 곗돈을 사기당한 게 억울해서 자주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다. 처음 보낸 사연이 방송된 것도 신기했지만 상품으로 유모차까지 받았다. 그때부터 사연을 보낼 때마다 내가 쓴 편지글이 선정되었고, 가전제품이며 꽤 많은 살림살이도 장만했다. 내가 글을 써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시인이나 작가는 하늘 저 너머 먼 먼 나라 사람의 이야기였지만, 동서커피문학상 공모전 광고를 듣고 시를 써서 응모하기도 했다.
나의 문학 이야기
나는 동화보다 먼저 시를 배웠다. 내 일기 쓰기는 시를 쓰면서부터 멈췄다. 어느 날 큰딸이 이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통곡했다는 말을 듣고는 재활용 수거함 더미에 던져버린 것 같다.
그리워했던 엄마의 자리에는 시가 대신 자리했다. 나는 엄마에게 할 말을 시로 옮겼다. 인터넷이며 오프라인이며, 여기저기 시 합평을 다녔다. 등단의 길에는 신춘문예만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몇 해 동안 보낸 신춘문예에서 늘 최종심만 거론됐다.
그러다 2003년 부산일보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보낸 작품이 최종심에 올랐는데 어느 학교 무슨 과를 나왔느냐고 물었다. 대학을 못 나왔다고 했더니, 당선이 결정되면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끝내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때야 나는 신춘에 당선되려면 대학을 졸업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이즈음 남편이 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시에 빠진 나는 가장 빨리 졸업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 입학했다. 사람들은 학교 수준을 운운했지만, 어디서든 자기 하기 나름이라 여겼다. 시 외의 다른 장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수업 중에 과제로 쓴 글을 공모전에 보내 상을 받기도 했고, 소설이나 평론이 최종심에 오르기도 했다.
동화는 한 학기 수업이었다. 교수님이 동화모임 동아리를 만드셨고, 썩 내키지 않았지만, 몇 번 합평에 참석하면서 세 편을 쓴 게 전부였다. 읽은 동화책도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책 한 번 읽어주지 못한 엄마였다. 어린 날을 잃어버린 나는 동화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 동화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내 속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을 공부하는 몇몇 군데를 찾아다녔다.
그 사이 남편은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빨리 빚을 갚아야 했다. 게다가 어머님은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글을 쓴답시고 사치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초등학교 방과후강사가 되었고, 수강하는 아이들도 꽤 많았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동안 쓴 글을 모조리 긁어모아 우체국으로 갔다.
그렇게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뜻하지 않게 동화가 당선되었다.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어머님 병실에서 받았는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어머님 옆에서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해 시는 다른 지방 신문 한 곳에도 최종심에 올랐고, 소설 두 편도 지방 신문 최종심에 올랐다.
시가 중앙지에 당선되지 못한 게 아쉬웠고, 소설이 최종심에 그친 게 아쉬웠지만, 동화의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 싶었다. 동화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 때문에 최종심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당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았다. 시가 최고의 장르라 여기는 목이 뻣뻣한 시인들에게 염증을 느낄 즈음이기도 했다.
사이트를 검색해서 부산 김재원 선생님을 찾아갔다. 시를 쓰지 못하고, 동화도 쓰지 못하는 10년은 훌쩍 지나갔다. 김문홍 선생님의 장편 합평 모임 소문을 듣긴 했지만, 하늘 같은 선생님께 닿는 길을 몰랐다가, 어찌어찌 합류하게 되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깜깜한 이야기가 조금씩 풀려나왔다. 지금까지 발간한 책은 김문홍 선생님의 합평 모임에서 쓴 글이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