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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Dec 05. 2023

보험을 해약하고도 속이 시원했던 이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 3

보험을 해약하다

얼마 전 보험 하나를 해약했다. 20년 만기의 보험으로 만기까지 2년이 채 남지 않은 보험이었다. 18년 넘게 넣은 보험을 하루아침에 해약하고도 전혀 아깝지가 않았던 건 순전히 보험이 지닌 성격 때문이었다. 해약한 보험에는 보장 시기에 문제가 있었다. 보험이란 것이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미래를 대비한 것이라지만 그 미래가 한 사람의 희생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 희생이 내가 아니라 타인이 해야 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든 보험은 종신보험이었다. 이는 피보험자가 죽어야만 보험금이 지급되는 생명보험이다. 그 보험에서 피보험자는 남편이었다. 이 말인즉슨 남편이 죽어야만 보험금이 지급되는 그런 보험이었단 말이다. 가끔 언론 매체에서 범죄자들이 보험금을 노리고 피보험자 몰래 여러 개의 보험을 들곤 하는데 그때 그들이 들었던 보험이 이런 생명보험이 아닌가 싶다. 그런 보험의 보험료를 남편은 20년 가까이 자신의 통장에서 자신의 손으로 지급하고 있었다. 순전히 가족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빠진 상태의 가족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보험을 가입하기 전 남편에게 당당하게 말하질 못했다. 보험의 종류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 채 빙빙 돌려 적금식 보험이라고만 했더랬다. 보험이라곤 하지만 만기가 되면 은행에 적금한 것처럼 그대로 찾을 수 있다는 말로 얼버무리기까지 했다. 남편은 그런 보험이라면 은행에다 적금을 하지 뭐 하러 보험으로 드냐고 반문했었다. 그건? 잠시 입을 막는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다.


'만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어마어마해. 여기서 무슨 일이란 게 뭔지 알지?'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기에.


그렇게 난 남편의 목숨값을 담보로 보험을 들었다(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수익자는 아들로 했다). 남편 없이는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는 나약함을 핑계 삼아서였다. 남편이 내가 든 보험의 성격을 모를 리 없었고, 나의 두려움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이유로 남편은 20년 가까이 보험료를 냈다. 자신의 희생이 나와 아이들을 위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서늘한 불안덩어리를 애써 삼키며. 


그런 보험을 해약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나와 남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보험이다. 보험이 사라지니 오히려 불안감이 사라졌다. 남편에게 빚진 기분도 사라졌다.


자식에게 부담 주는 부모가 되기 싫어서

보험 하나를 정리했더니 그제야 다른 보험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존의 보험들을 다시 점검해야 했다. 오래전에 든 보험이 몇 개 있었는데 정작 나이 든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실비보험이 빠져 있는 걸 발견했다. 실비보험과 함께 다른 보험을 추가해 들었다. 보험이 늘어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곧 만기 되는 보험이 있어 그대로 추진했다.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을 책임지고 키워내야 한다는 마음에 보험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남편과 나)를 위해서 보험을 들어야 했다. 죽고 나서 아이들에게 물려줄 보험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자식에게 피해가 되는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보험이라야 했던 것이다. 해약 전과 후의 금액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생명보험을 미련 없이 해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다.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이러저러한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동안 그들에게 부담이 되는 부모가 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힘으로 생활하며, 아프더라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생명보험을 넣었던 건 미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려워했던 미래가 현재가 된 상황에서 미래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두려움의 대상은 오히려 우리 자신이 되었다. 아파서는 안 되지만, 언제 아플지 모르는 우리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자식을 독립시키고, 자식에게서 독립한 부모는 자식들에게 불확실한 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인생 후반의 보험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보험으로다가 말이다. 


해약한 보험 얘기를 쓰고 있자니 설계사가 만류했던 게 생각 나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하다. 훗날 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큰돈이었는데 쓸데없이 푼돈으로 받았나 싶어. 그럼 뭐 하나. 그건 까마득한 훗날의 얘긴데. 그리고 그때쯤이면 아들은 이미 우리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런 믿음이 있기에 이렇듯 미련 하나 남기지 않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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