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덕분에 인생은 아름다워지고 있다
햇살이 한창 기세를 부리던 오후였다.
창문 너머로 무심한 듯 들이치는 햇볕은 나뭇잎 하나마저 숨죽이게 만들었다.
동네 아이들도 오늘따라 어딘가 다들 사라진 듯, 골목은 고요했고, 마당의 고양이마저 혓바닥을 내민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뜨겁고 가만한 하루였는데,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일었다.
처음엔 미세하게 커튼이 흔들리더니, 이내 방 안 가득 은은한 향기를 싣고 들어오는 바람.
마치 오래된 친구가 슬며시 어깨를 토닥이며 “고생했어, 오늘 하루도” 하고 속삭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아, 바람도 사람 마음 같구나.’
어떤 날의 바람은 무정하다.
마당에 말려 두었던 이불을 펄럭이며 날려버리고, 괜히 닫아놓은 마음의 창을 거칠게 두드린다.
삶이란 그런 날들의 연속일 때가 있다.
예고 없이 들이닥쳐 모든 걸 어지럽히고, 말아버리고, 때론 영영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무엇인가를 잃게도 만든다.
예전에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가족이 아프고, 꿈도 보이질 않고, 하고있는 일들에 문제가 막 생기고, 내 마음 하나 붙잡을 곳 없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던 시간. 그때도 바람은 불었다.
단지 그 바람은, 내가 너무도 버겁고 힘들어서 ‘왜 이런 바람이 나한테만 불어대는 걸까’ 하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바람은 결국 지나갔다.
길고 힘들었던 그 시간도, 어느새 계절이 바뀌듯 잦아들었고, 나는 어느 틈엔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단단해진 내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때로는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지만, 또 어떤 때는 마음에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움의 숨을 불어넣어 준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태풍이 되었다가도, 또 어떤 날은 무더위를 밀어내는 한 줄기 선선한 숨결이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견디기 힘든 날도 찾아오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원망하고, 주저앉고, 때로는 낙담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그러나 감사한 건, 그 모든 순간들이 ‘지나간다’는 것이다.
어떤 바람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폭풍도 지나가고, 시원한 바람도 다시 멎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걷고, 또 숨 쉴 수 있는 거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그 바람은, 나무잎을 살짝 건드리며 지나가고, 내 머리칼 사이로 조심스럽게 스며든다.
그 속삭임이 꼭 이렇게 들리는 것 같다.
“괜찮아. 너 잘하고 있어. 이 바람도 곧 지나갈 거야.”
욥의 고백이 그랬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통의 바람 속에서도 욥은 고개를 들어 그 말씀을 기억했다.
그도 알았던 것이다.
바람은 언젠가 잦아들고, 그 자리에 빛나는 삶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도 기억하자.
살면서 만나는 바람들, 그 모든 바람들이 결국 우리를 단련시키고, 우리 삶의 굴곡에 결을 새겨준다.
그 결은 곧,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아름다움이고 흔적이다.
폭풍일 땐 견디면 된다.
시원한 바람일 땐 감사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바람 속에서도 '지나간다'는 사실을 믿으며 오늘을 살아내면 된다.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걷는 인생이, 결국은 가장 인간적인 삶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 바람 덕분에 조금씩 아름다워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