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 이야기
넷플릭스에서 유행하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았다. 제목부터 정겹고 따뜻했다. 제주 방언으로 "수고했습니다"를 뜻하는 그 말은, 하루를 마치고 서로에게 건네는 가장 진심 어린 위로이자 격려 같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 양관식과 오애순을 보며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들의 인생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고, 삶은 고단했지만 사랑은 굳건했다.
내 아버지는 농부셨다. 늘 자전거를 타고 감나무 밭과 선산, 논을 오가셨다.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그 길은 단지 땅을 향한 여정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헌신의 길이었다. 아버지는 말씀이 적으셨다. 대신 땀으로, 손마디의 굳은살로, 새벽에 남긴 자전거 바퀴 자국으로 사랑을 표현하셨다. 그 자전거에는 생계가, 자식이, 삶이 실려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학교를 간 적이 있었다. 쌀쌀한 아침 공기 속에서 덜컹거리는 자전거 소리와 함께 시작된 하루.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오를 때면 아버지의 등이 눈앞에 가득 찼다. 그때 바라본 아버지의 등은 백두산보다도 높고 든든했다. 약간 구부정하지만 넓은 그 등은 어린 나에게 세상을 다 품고 있는 벽 같았다. 지금도 그때 그 등 위에서 느끼던 평안함과 따뜻함이 그립기만 하다.
어머니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셨다. 곰짱어도 팔고, 목욕할 때 쓰는 이태리 타올도 팔고, 우의와 장갑까지도 있었던 그곳은 요즘 말로 하면 작은 마트였다. 선반에는 색색의 사탕 봉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벽에는 어린이 만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아이들은 동전을 손에 꼭 쥐고 와서 사탕 하나를 고르고, 어머니는 그 손을 따뜻하게 덥석 잡으며 “이건 내가 주는 거야” 하고 하나 더 쥐어주셨다.
가게는 동네의 사랑방 같기도 했다. 근처 버섯공장에서 사람들이 퇴근하고 돌아올 즈음이면 으레 가게로 향했다. 누군가는 막걸리 한 병을 사고, 누군가는 곰짱어 한 봉지를 구워달라 부탁했다. 어머니는 쟁반에 손수 따뜻하게 구운 곰짱어를 담아 내주시고, 덤이라며 한 주먹을 더 얹어주셨다. 그 곁엔 정겨운 안부가 함께 곁들여졌다. “오늘도 고생 많으이소.”
가게 평상에 둘러앉아 막걸리잔을 부딪치는 소리, 웃음소리, 하루를 털어내는 한숨들이 어머니의 가게를 가득 채웠다. 그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장부에 빚 대신 정을 적으셨고, 가게는 단순한 생계의 공간이 아니라 이웃의 피곤한 하루를 위로하는 쉼터가 되었다.
아버지는 밭에서 돌아오면 어머니의 가게 평상에 앉아 물 한 바가지를 들이켰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주셨다.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사랑과 존경이 서려 있었다. 관식과 애순처럼, 우리 부모님도 말없는 정으로 긴 세월을 견디셨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 삶의 흔적이 내 기억 속에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감나무 가지를 치고, 자전거 바퀴 자국이 논둑길에 나 있고, 구멍가게 문이 삐걱 열리던 소리까지도 생생하다. 그 모든 것들이 내 부모님의 삶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은 단순한 수고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을 다 바쳐 살아온 이들에게 드리는 존경의 인사다. 아버지, 어머니… 참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그 시절, 그 자전거, 그 구멍가게, 그 모든 날들 위에… 폭싹 속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