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꼬집의 여름, 한 꼬집의 사람
한 꼬집의 여름, 한 꼬집의 사람
영대리까지는 한낮의 볕이 길 안내를 했다. 길가의 강아지 풀들은 더 이상 꽃을 흔들 기운도 없는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고, 논두렁의 풀들은 바람만 스쳐도 바스락 소리를 냈다. 볕에 바싹 말라서 살을 스치는 먼지까지도 소리의 모양을 갖고 움직이는 듯했다. 할머니 댁 마당 들머리에 들어서자 장독대 옆에서 퍼올라오는 메주 냄새가 코끝을 톡 건드렸다. 오래된 것들이 시간이 낸 향기였다. 깊고, 묵직하고, 부실 것 하나 없는 냄새였다.
“왔나.”
여든두 살이신 강무증 할머니는 인사를 대신해 굽은 허리를 한 번 펴보였다. 땀에 젖은 셔츠가 등에 붙어 있는 젊은 목사가 어지간히도 안쓰러웠나 보다. 할머니는 굳이 말하지 않고 부엌 찬장으로 가서 소금 한 꼬집을 집어, 유리컵에 따른 냉수에 톡 던졌다. 소금은 물속으로 들어가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은 여전히 맑고 투명했지만, 입술에 닿는 순간 맛이 달라졌다. 한 모금이 목을 타고 지나는 동안, 더위로 축 늘어졌던 장기들이 하나둘씩 제 자리를 찾는 느낌이었다. 세상이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닌데, 그 한 꼬집이 몸의 방향을 틀어주었다. 살려내는 맛이었다.
그날 나는 소금이 모양을 잃어야 제맛을 낸다는 사실을 새삼 배웠다. 세상에는 모양을 지켜야 더 빛나는 것들이 있다. 유리그릇, 옥수수의 노란 알들, 갓 다린 흰 셔츠. 반대로 모양을 버려야 비로소 제 일을 시작하는 것들도 있다. 장작은 불꽃에 제 몸을 내주어야 온기를 나누고, 메주는 짓이겨져야 된장이 된다. 소금도 그렇다. 모래처럼 반짝이다가도 물에 스며들어 자취를 감춘 뒤에야 비로소 맛이 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람 살이도 대강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모양을 한 치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고 이를 악문 날들보다, 모양을 좀 풀어놓고 누군가의 갈증을 덜어 준 날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의 소금 한 꼬집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 한 동네가 어떻게 서로를 살려왔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표정이었다. 여름엔 누구 집 마당이 먼저 그늘을 길게 드리는지 사람들이 안다.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면 어느 지붕이 먼저 새는지, 어느 집 창문 틈이 먼저 바람에 울리는지도 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망치 들고 올라가거나, 신문지를 접어 창문 틈새에 밀어 넣어준다. 방앗간에서 떡을 뽑던 날이면 덤으로 한 줌씩 싸서 골목으로 나누어 준다. 이런 일들은 기록으로 남지 않지만, 동네의 맛을 지켜왔다. 짜지도 맹맹하지도 않게, 딱 먹어지도록,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분량만큼만.
교회도 비슷하다. 예배 시간에 앞서서 교회당 로비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며 주보를 나누는 손, 주방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손길들, 아이들 가정을 찾아가 아이들을 태워오는 운전대를 잡은 그 손,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전날 밤늦게 까지 수고하느라 손마디가 쑤시는 손이 있다. 이름을 부르지 않지만, 그 손들 덕에 사람들은 즐겁게 앉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러지고, 아이들은 안전하게 교회로 와서 성경을 배운다. 그 손이 하는 일은 소금과 닮았다. 흔적이 없지만, 맛이 된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을 때, 아마 이런 얼굴들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네가 소중하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머물지 않고, “녹아 없어져서 세상을 살려라”라는 분명한 부탁까지 건네신 것이다. 살리는 맛을 내는 사람들이 되라고.
물론 소금이 많이 들어가면 음식이 망가지듯, 녹아든다는 말이 자신을 함부로 소모하라는 뜻은 아니다. 소금은 적당해야 한다. 끓는 찌개에 마지막에 넣어야 제맛이 나는 것처럼 때도 가려야 한다. 사랑도, 친절도, 헌신도 그렇다. 너무 늦으면 이미 국물이 넘쳐버리고, 너무 성급하면 속까지 간이 배지 않는다. 한 꼬집의 정확함. 누구에게는 이 정확함이 가장 어렵다. 마음은 앞서고 몸은 지치고, 어느 지점에서 덜어내야 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더 넣어야 하는지 늘 계산이 틀린다. 그래서 더더욱 서로가 필요하다. 옆 사람이 “이쯤이면 됐다”라고 말해주고, 또 다른 사람이 “조금만 더”라고 귀띔해 준다. 함께 사는 일은 결국 맛을 맞추어 가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 하는 일다.
나는 종종 할머니의 그 유리컵을 떠올린다. 물은 맑았다. 그 맑음이 좋아서 그대로 두고 싶다는 유혹도 있다. 품이 더러워질까, 맛이 달라질까 두려워 섣불리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으려는 마음. 하지만 갈증은 맑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땀에 엉킨 몸에게는 한 꼬집이 필요하다. 내 하루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투명하고, 간섭받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은 마음. 그때 어쩌면 누군가의 목에 작은 힘이 되어 주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소금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설거지통 앞에서 “오늘은 내가 할게”라고 말하는 한마디, 늦게 온 사람을 위해 자리를 조금 더 옮기는 허리, 말을 다 하지 않고 삼키는 침묵 한 숟가락. 사라지는 선택들이 남기는 맛은 오래간다.
소금의 일은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끔 외롭다. 내가 녹아든 자리를 아무도 모를 때 허무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장독대 옆에 서 있던 메주 냄새를 떠올린다. 메주는 혼자 익지 않았다. 햇볕과 바람과 손의 부지런함이 거기 있었다. 소금도 혼자 맛을 낼 수 없다. 물이 있어야 하고, 끓는 불이 있어야 하고, 함께 먹을 식구가 있어야 완성된다. 나의 한 꼬집이 누군가의 한 모금과, 또 다른 이의 그릇과 만나 맛을 낸다. 세상에 혼자서만 완성되는 선한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사람은 공동체를 찾는다. 서로를 살리는 맛을 내기 위해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엌에서 소금을 집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손끝을 노려 본다. 과하지 않게, 모자라지도 않게. 소금 종지에 숨어 있던 곱고 하얀 결정들이 손가락 사이에서 작고 가벼운 돌멩이처럼 구른다. 그 작은 것들이 내 하루를 어떻게 바꿀지, 누군가의 입술에 닿았을 때 어떤 표정을 만들지 상상해 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누군가의 컵에 떨어질 나의 한 꼬집을 떠올린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의 말은 커지고 몸은 작아지기 쉽다. 그럴 때 더더욱 손끝이 정확해지기를, 소리가 아니라 맛으로 남기를, 나는 조용히 다짐한다.
여름은 결국 지나간다. 바스락거리던 논두렁의 풀도 다시 물이 올라 오르고, 강아지풀도 얼굴을 다시 들고, 장독대 뚜껑 위엔 얇은 빛이 내려앉는다. 시간을 지나며 익어 가는 것들은 한결같다. 가지려고만 하는 데서가 아니라, 건네고 나누는 데서 제맛을 배운다. 소금처럼, 메주처럼, 그날의 할머니처럼.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내 모양을 고집하기보다, 누군가의 갈증을 덜어 주는 맛이 되는 일이라고. 눈에 띄지 않게 녹아드는 그 한 꼬집이 세상을 살게 한다고.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내 앞의 유리컵에 떨어뜨릴 한 꼬집을 아끼지 않는 일, 그 조심스럽고도 분명한 선택 속에 이미 희망이 깃든다. 내일도, 모레도, 우리는 각자의 소금 종지를 열어 누군가의 여름을 살릴 것이다. 그렇게 살면, 인생의 맛은 생각보다 금방, 그리고 오랫동안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