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감정이 나를 다스릴 때
사람 하나가 그렇게 되기까지, 참 많은 계절이 흘렀을 것이다. 한 번쯤은 웃고, 수없이 울고, 어딘가에 기대어봤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도 했을 테지. 다 말할 수 없는 속내들을 꼭꼭 눌러 삼키며 살아내야 했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밤잠을 설쳤을 수도 있고, 혼자 훌쩍이며 방바닥에 떨어진 햇살 한 조각을 부질없이 바라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문득 문득, 내 안에 자라고 있는 낯선 감정들에 놀란다. 분명 나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날은 쓸쓸함이, 어느 날은 미움이 나보다 먼저 말을 건다.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 같은 날. 평소엔 얌전한 생각들이었는데, 어느 틈에 큰소리치며 내 결정을 흔들고 만다.
처음엔 그냥 작은 한숨이었다. 길가의 먼지처럼 털어내면 그만일 줄 알았다. 누가 봐도 사소한 일이었고, 금세 잊힐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 감정은 내 안에서 은근히 둥지를 틀었다. 내 생각의 틈틈마다 들어와 말 걸기를 반복했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더라.
“너도 많이 참았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너만 왜 이렇게 살아야 해?”
위로인 줄 알고 들어준 말들이, 알고 보니 변명이고 핑계였다. 미움에 이유를 붙이고, 불평에 이름을 붙이고, 원망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었다. 내 마음은 마치 무너져 내린 둑 같았다. 물이 흘러넘치고 있다는 걸 아는데, 어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상황. 그저 속수무책으로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조용히 다가와 주시는 분이 있다.
“이건 네가 아니야.”
그 한마디면 모든 방어가 무너진다.
누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 목소리 앞에선 어떤 반박도, 어떤 핑계도 소용이 없다.
빛은 그런 것이다.
크게 외치지도 않고, 억지로 문을 열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다만 아주 솔직하게 내 마음의 안쪽을 비춘다.
그곳에 낀 먼지를 보여주고, 어둠을 드러내고, 닫혀 있던 창을 열게 만든다.
내가 외면했던 나, 감추고 싶었던 나를 가만히 마주보게 한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겉모습만 보고 단정하지 않기를.
그 사람 안에 어떤 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지,
그 이야기를 살아내느라 얼마나 애썼을지, 내가 그 모든걸 다 알 수 없음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을 들기 전에, 내 안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사람이 되기를.
정죄보다 긍휼이, 판단보다 기다림이 먼저인 삶.
그렇게, 천천히 익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오늘도 마음 문 앞에 서 있다.
지키고 또 지켜야 하는 이 문 앞에서,
어제보다 조금 더 정직하게, 조금 더 조용하게 서 있는 순례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를 이끄는 분의 손이 있다면, 그 손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리고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마태복음 6장 34절
오늘도 나는 주님 손 꼭 잡고,
내 마음의 작은 등불 하나 밝혀놓고,
순례의 길을 걷는다.
천천히,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